일찍부터 음악을 듣고,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친형이나 동네 형, 사촌 형 등 음악 선생님 역할을 한 누군가가 있었다는 점이다. 내게도 형이 있었다. 우리 형은 고등학생 때 주로 하드록, 헤비메탈을 즐겨 들었다. 아이언 메이든, 키스, 레드 제플린 등 폭발적인 기타와 드럼 연주, 그 사이를 뚫고 나오는 터질 듯한 고음의 보컬을 좋아했다. 형은 가끔 종로 전자상가에서 구해온 헤비메탈 그룹의 불법 ‘빽판’을 들려주었다. 금지하면 더 하고 싶은 묘한 심리를 따라 호기심을 자극하고,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청소년의 심장을 자극해 인기를 끈 음악들이었다.
--- p.29
아직 전세계의 연결이 지금보다 훨씬 느슨하던 1983년에 문워크는 태평양을 건너와 대한민국의 봄소풍 장기자랑에서 한 반에 한 명은 무조건 문워크를 하는 기현상을 만들어냈다. 1983년 대한민국 봄소풍, 나무 밑에 둥그렇게 자리 잡은 3반에서도, 연못가에서 판을 벌인 6반에서도, 그냥 흙바닥에 대강 자리 잡은 11반에서도 누군가는 반드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틀어놓고 문워크를 했다. 단 한 반도 예외가 없었다. 여기도 문워크, 저기도 문워크였다. 마이클 잭슨의 세상이 왔다.
--- p.32
레코드점의 상호를 자신의 이름이 아닌 부인의 이름을 사용할 정도로 전면에 나서기를 즐기지 않았던 김영 대장님의 선택이 노래를 포함해 말투, 대체적인 느낌과 성향까지 모든 것이 언더그라운드 스타일인 음유시인 조동진과 찰떡같이 잘 맞았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장르는 포크에 기반을 두고, 활동은 주로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 서정성이 주된 정서를 이루는 동아기획의 음악들은 이런 배경과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 p.46
‘들국화’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에서는 뭐랄까, 세련되기보다는 오래된 느낌, 그러나 뭐가 됐든 정통파일 것 같은 기운이 전해졌다. 형이 추천했으니 장르는 록큰롤이겠거니 싶었다. 크게 관심은 없는 상태로 워크맨에 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워크맨은 처음으로 휴대용 오디오 플레이어를 개발한 일본 전자회사 소니의 브랜드 이름이지만 휴대용 라디오,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통칭하여 워크맨이라고 불렀다. 나는 빨간색 아이와 (역시 일본 회사다.) 워크맨을 가지고 있었다. 들국화 1집을 빨간색 워크맨에 집어 넣은 기억이 또렷한 이유는, 그로부터 약 10분 동안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59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해도 혼이 실려 있지 않으면 그 공은 볼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싶은 이야기는 실제로 프로야구 심판이 한 말이다. 황당한 이야기가 맞긴 한데, 야구팬은 또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 혼이 실린 공만 스트라이크다. 이 말을 그대로 가수에게 가져와서 혼이 담긴 노래만 노래라고 한다면, 노래이긴 하지만 노래가 아닌 노래도 있겠다. 유난히 혼을 실어 공을 던지는 투수가 있듯이, 항상 영혼을 담아 노래하는 가수도 분명히 있다. 노래 전체, 아니 한 음, 가사 한 소절, 호흡 하나까지 영혼이 실린 노래를 부르던 영원한 가객, 김현식이 그렇다.
--- p.90-91
오지 오스본 Ozzy Osbourne의 음악은 귀로만 들어도 음악이 온통 시커멓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낀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다. (…)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나에게 이소라의 음악은 자연스레 머릿속에 보라색을 떠올리게 했고, 김현철의 음악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과 고층 건물의 스카이라인이 눈앞에 좌르륵 펼쳐지게 하는 소리를 품었다고 느꼈다.
--- p.102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 대중음악이 예술적으로 찬란하게 빛났던 시기는 1992년 서태지에게 대중가요가 정복당하기 직전의 몇 년을 말한다. 조동익이 참여한 《야샤 콜렉션》은 이 시기에 발표된 우아하고 아름다운 음반 중 하나였다. 《야샤 콜렉션》은 조동익, 함춘호, 손진태, 김현철 네 명이 각자 작곡한 곡을 두 곡씩, 모두 여덟 곡을 수록한 연주 앨범이다. 동아기획을 중심으로 활동한 들국화, 어떤날, 시인과 촌장, 그리고 김현철까지, 이 뮤지션들이 소속했던 팀의 이름을 기억한다면 놓칠 수 없는 앨범이다.
--- p.136
넉 장의 앨범으로 막을 내린 우리노래전시회가 이어가지 못한 언더그라운드 싱어송라이터의 발굴은 유재하를 기리며 1989년에 시작한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를 통해 이어졌다. 1회 금상 수상자인 조규찬을 비롯해 유희열, 김연우, 정준일 등 우리노래전시회와 유사한 감성을 지닌 싱어송라이터가 무수히 배출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지금도 우리 대중음악에서 특별한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또한 조동익이 주축이 된 하나뮤직, 지금의 푸른곰팡이가 동아기획과 우리노래전시회 음반이 품었던 낭만성과 언더 감성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다.
--- p.185
최고 수준의 무대는 분명 1996년 마이클 잭슨의 공연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을 움직였던 공연과 무대를 생각해보면 그건 조금 다르다. 조동익과 이병우가 세션으로 나섰던 조동진 공연, 유영석을 처음 본 벗님들 공연, 드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도쿄 느낌의 봄여름가을겨울 공연, 힘겨워 보였던 김현식의 모습 등 동아기획 뮤지션들의 공연 장면들은 내 가슴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 p.201
윤종신의 목소리로 노래한 “동전 두 개뿐”을 신호탄으로 대중가요 가사는 구체적인 표현이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구체적 서사성이 조동진, 시인과 촌장, 어떤날의 서정성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구름처럼 마음의 이곳저곳에 비를 내리기보다는, 송곳처럼 정확하게 심장 왼쪽 하반부 3.2센티미터 지점을 저격하는 류의 가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공일오비나 윤종신, 토이 같은 새로운 뮤지션들이 소개하는 구체성을 띤 가사와 멜로디는 나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후벼 파곤 했다.
--- p.224
첫사랑이 지나면 두 번째 사랑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20세기가 저물고 있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을 좋아했던 20세기가 지나고 빌 에번스의 〈어텀 리브스〉를 듣는 21세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 p.267
기본적인 취향은 여전하다. 지금도 가끔 어떤날, 이병우와 조동익의 음악을 꺼내 듣고 깊은 감상에 빠질 때가 많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김현철, 빛과 소금의 오래된 곡들도 여전히 좋다. 조규찬과 이승환, 공일오비, 김동률, 그리고 토이의 음반 발매 소식이 뜸해진 것은 못내 섭섭하며, 그래서 매달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는 윤종신에게 크게 고맙다.
---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