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인 것과 모성적인 것의 생성적 힘의
남성에 의한 전유, 성차의 은폐,
그 전유와 은폐의 망각을 드러내는 구조와 글쓰기
이리가레의 학문적 여정에서 서양철학의 남근중심성과 관념성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춘 ‘비판의 시기’에 속하는 『반사경』은 여러 남성 철학자들의 텍스트의 세심한 인용과 그에 대한 도발적이고 예리한 질문을 통해 비판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가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리가레가 이렇게 남성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비판하며 밝혀내고자 한 것은 바로 ‘여성적인 것과 (인간의 기원으로서의) 모성적인 것의 생성적 힘의 전유, 성차의 은폐, 그리고 그 전유와 은폐의 망각’이다. 즉, 인간이란 어떤 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이며 성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 차이가 철학사에서 어떻게 무시되거나 제거되어왔는지, 또한 남성을 위해 전유되어왔는지가 검토된다.
이때 성차는 인간은 이데아나 절대정신이 아니라 어머니의 육체로부터 태어난다는 사실, 최초의 타자이기에 가장 중요한 타자는 바로 어머니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어머니와 같은 성에 속하는 사람이 이 기원에 대해 맺는 관계와 다른 성에 속하는 사람이 맺는 관계가 다르며, 이 다름이 타자와 관계 맺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비대칭적인 차이를 낳는다.
아이의 수태와 탄생은 시초라는 문제를 반복하고 재생산한다. 자신의 시초에 대한 여성의 관계, 그리고 본래적인 것의 경제의 설립에 대한 여성의 관계-남성과 같으면서도 다른-라는 문제를. 그러므로 아이의 수태와 탄생은 결국 여성이 최초의 사랑의 “대상”인 자기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하고, 여성을 계보의 경제, 그리고 또한 특수한 반사의 경제 속에 끼워 넣을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가 되는 여성은 대문자 어머니일 텐데, 일종의 자기 어머니 살해와 여성-모성 관계의 소멸로써 모성과 전적으로 동일시된다. 모성은 현재로서는 여성이 기원, 즉 남근적 어머니-대지라는 장소를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132쪽, 1부 「대칭이라는 오래된 꿈의 맹점」 중에서
이 책은 반사경(오목거울)처럼 구조화되어, 프로이트(1부)에서 시작하여 서양 형이상학의 시초인 플라톤(3부)으로 (자궁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한 히스테리에서 휘스테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이트에게서 여성은 히스테리 환자가 될 수밖에 없고, 플라톤에게서 자궁(휘스테라)은 동굴처럼 인간을 미몽에 빠지게 하는 무지 혹은 무의 세계의 표상이 된다.
‘반사경’이라 이름 붙은 2부는 시간 순서대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를 거쳐 데카르트, 칸트, 헤겔까지 비판적으로 검토되는데, 마지막 장이자 이 책의 한가운데에 있는 ‘경계를 한정할 수 없는 부피’는 오목거울의 정중앙 초점처럼 이 책의 관점을 이루는 여성(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이리가레는 서로 대립 또는 비판하거나 극복 또는 전복하는 남성 철학자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성차의 망각, 은폐, 모성적 힘의 전유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이론적 작업에서 모든 체계를 뒷받침하며 말하기를 거부하는 외부로서의 기능과, 모든 근거가 제공되는, (여전히) 침묵하는 모성적 토대의 기능을 동시에 맡고 있는 총칭으로서의/하나의 여성은 이론에 의해 코드화된 방식에 연관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다시, “주체”의 상상적인 것-그것의 남성적 내포 속에서-과 “여성적인 것”의 상상적인 것(일 것)을 혼동하는 이론에 의해서 말이다.
―668쪽, 이리가레의 말
『반사경』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주제로 삼는 동시에 남성 언어를 똑바로 발화할 수 없는 여성 히스테리 환자가 불완전한 문장들로 남성 철학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말을 거는 문학적 스타일을 구사하는, 철학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평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텍스트를 번역하고 읽기 어려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글쓰기 방식에 있다. 이리가레는 개념어나 단어의 어원과 접두사를 활용해 의미를 재구성하고, 괄호에 넣은 전치사를 통해 한 문장 안에 두 가지 의미를 담으며, 하나의 동사가 가진 여러 의미들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렇게 기존의 (남성) 언어를 해체하고 낯설게 재구성하는 이리가레의 글쓰기는 전통적인 철학의 개념어들 아래 숨어 있는 근본적인 의미들을 꺼내어, 철학이 배제하면서도 원천-자원으로 삼아온 것, 즉 여성적인 것과 모성적인 것, 여성과 어머니를 새롭게 조명한다.
꿈꾼문고 ‘ff 시리즈’는
‘fine books x feminism’ 인류 역사에서 가장 낡은 부조리인 성차별과 그에 단단한 뿌리를 둔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의 폭력과 위선을 파헤치고 고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선언, 연설, 이론, 문학 들을 소개하는 기획이다. 인류가 이룩한 찬란한 문명과 지적 성취 속에서 인간의 표상은 왜 항상 남성인가, 여성은 대체 어디에 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여성은 남성에 부차적인 제2의 성이며 2등 시민이 아니라 동등한 인권을 가진 대등한 인간임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역설해야 하는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연대의 힘찬 전진에 함께하길 소망한다.
1 올랭프 드 구주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
2 시몬 베유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
3 엘리자베스 그로스 『몸 페미니즘을 향해』
4 페멘 『페멘 선언』
5 베릴 베인브리지 『포도주병 공장 야유회』
6 로지 브라이도티 『변신』
7 조르주 상드 『모프라』
8 제인 갤럽 『페미니즘과 정신분석』
9 뤼스 이리가레 『반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