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빠져나오자 내 시야로 ‘인간 꽃’이 쏘옥 들어왔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 건축물 몸체와 (미래로의) 콘크리트 교각이 어우러져 생긴 틈새로 조각품이 활짝 핀 꽃처럼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조각가 김영원(1947~) 전 홍익대 교수의 작품은 늘 그 자리에 서 있다.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공공조형물에 대한 관심이 생기자 거리 위 작품이 예기치 않은 위치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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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미술관 앞 〈관계항-예감 속에서〉는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크기가 다른 철판 여러 장이 비대칭 구조로 꽃봉오리처럼 등을 맞대고 높이 세워져 있다. 그것을 중심에 두고 두 겹의 철판이 가지를 뻗듯 빙글빙글 돌아간다. 소용돌이 모양이 엄청난 크기의 꽃처럼 보이는데, 그 소용돌이치는 철판 주위로 커다란 돌이 듬성듬성 무심하게 툭툭 놓여 있고, 두 겹으로 세운 철판 사이에도 돌이 촘촘히 박혀 있다. 세월이 흘러 철판에는 녹이 슬었지만 돌은 변함이 없어서, 성격이 다른 두 재질의 대비는 묘한 긴장감을 준다. 그 사이를 걸으면 돌과 철판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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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은 어디에, 어떻게 세워져 있는가에 따라 맛이 다르다. 흰 벽으로 둘러싸인 미술관에서 예술의 오라(aura)를 풍기며 전시되는 작품도 거리로 나오는 순간 처지가 달라진다. 미술관에서는 모든 환경이 작품을 떠받들어주지만, 거리로 나오는 순간부터 미술 작품은 일상의 풍경과 경쟁해야 한다. 자전거 거치대, 알록달록한 간판 등 시선을 뺏는 다른 요소들 때문에 작품은 잡다한 도시 풍경에 묻혀버리기 십상이다. 홈플러스 영등포점 앞의 〈지나간 세기를 위한 기념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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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북면 추산리. 병풍처럼 둘러싼 수직 암벽의 귀퉁이가 송곳니처럼 우뚝 솟아 있어 송곳산(추산)으로 불리는 산 아래, 코스모스 리조트가 순한 아이처럼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자세로 말이다. 핀란드 만화 주인공 ‘무민’의 피부처럼 포동포동, 희고 매끈한 건물 2개 동이 서로 조금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었다. 송곳산 아래 들어선 리조트 건물은 엄해 보이지만 속은 한없이 자애로운 할아버지 앞에서 놀고 있는 손주들처럼 천진해 보였다. A동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팔랑개비 날개처럼 소용돌이치는 구조로 돼 있다. B동은 눕혀놓은 소라고둥의 옆구리 곡선처럼 가지런히 휘어진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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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방탄소년단)가 선택한 곳은 서울대가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오프라인 졸업식에 가지 못하는 전 세계 졸업생을 위로하고자 유튜브가 마련한 온라인 가상 졸업식. 이름하여 ‘디어 클래스 오브 2020’ 연설 장소에 대한 이야기다. (…) 그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시관 앞 ‘역사의 길’에서 축사를 했고, 야외 ‘열린마당’에서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부르며 대미를 장식했다. 그렇게 BTS를 통해 국립중앙박물관이 전 세계에 소개됐다.
--- pp.125~127
용산의 랜드마크가 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을 그저 덩치만 큰 건물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모욕이다. 이렇게 꾸밈없이 당당하고 기품 있는 ‘단아한 입방체’ 건축물이 서울 도심에 다시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 어마어마한 덩치의 단일 건물인데도,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 빌딩(옛 대우빌딩)이 주는 위압적인 느낌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을 보면, 달항아리의 어진 마음이 느껴진다. 아주 단순한 입방체 형태가 경쟁하듯 뽐내는 주변의 마천루 빌딩을 어머니처럼 푸근하게 품고 있기 때문이다.
--- pp.145~148
세종문화회관은 전통 그대로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종문화회관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한국적인 냄새가 난다. 추녀와 서까래, 공포, 기둥 등에서 전통 건축이 지니는 선(線)의 맛이 나기 때문이다. 엄덕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면에는 동종(銅鐘)에서 보이던 비천상(飛天像) 부조를 장식했고, 격자와 떡살무늬 창살을 커다랗게 달았다. 비천상 부조는 그가 디자인하고 미술작가 김영중이 조각했다. 내부에도 솥뚜껑과 청사초롱을 형상화한 샹들리에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 둘은 아쉽게도 이후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사라졌다. 다행히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박쥐 문양 부조는 남아 있다. 이처럼 구석구석의 디테일에서 “한국적 정서를 건물에 녹여내고 싶었던” 건축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 pp.183~184
길거리 조형물은 꼭 그렇게 좌대 위에 수직으로 꽂혀 있어야만 하는 걸까. 아파트 밖 대로변을, 사무실 주변 식당가를 걸어보자. 구상 조각이든, 추상 조각이든 십중팔구 수직으로 세워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는 1960년대 이후 회화도 조각도 아닌 제삼의 미술이 출현했다. 그런 미술의 사례인 설치미술, 대지미술, 비디오아트 등은 지금 대세로 굳혀졌다. 그런데 한국의 거리 미술은 여전히 조각이라는 전통 장르에서 벗어 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설치미술가 김승영(1963~)이 공원과 아파트 등 공공장소에 설치했다는 새로운 작품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귀가 번쩍 뜨였다. 그 흔한 수직의 형태를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새롭다.
--- p.217
〈윤슬〉은 공중 보행로 덕분에 ‘오르고 내리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행위’의 경험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되었다. 특히 ‘거울 루버’가 부리는 마술은 놀랍다. 사방의 풍광을 품고, 그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기도 한다. 움푹 꺼진 콘크리트 바닥에는 루버에 반사된 빛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물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은 〈윤슬〉이다. ‘윤슬’은 우리말로 햇빛이나 달빛이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한다.
--- p.243
옛 주민의 추억이 어린 곳에 정지현 작가는 〈타원본부〉를 내놓았다. 뽐내듯 위로 치솟지 않은, 절벽과 폭포의 장관을 가리지 않도록 수면 위에 조용히 누운 노출 콘크리트 작품은 내부로 갈수록 옴폭해져 얕게 물을 담을 수 있다. “애들이 오면 ‘접시 물’에 들어가 첨벙첨벙 뛰어놀아요.” 공원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 아주머니가 말했다. 폭포의 물보라에 옷이 젖어도 기분 좋아지는 공간이다. 어느새 타원은 ‘접시’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 p.255
홍제유연은 서울시가 외부 전문가와 함께 꾸리는 ‘서울은 미술관’ 프로그램 2호로 조성됐다. 장석준 미술 기획자가 예술 기획을 맡아 1년여 준비 끝에 탄생했다. 디자인 그룹 팀코워크(Team Co-Work), 뮌(Mioon), 염상훈, 윤형민, 진기종, 홍초선 등 작가 6팀이 참여해 설치 작품, 사운드 아트, 홀로그램, 조명 예술 등을 선보였다. 상가를 떠받치는 100여 개의 콘크리트 기둥, 그 사이를 흐르는 물길과 징검다리, 하천변 보행로, 터널 속 같은 적당한 어둠 등 어디에도 없는 지형적 조건을 바탕 삼아 예술이 흐른다.
--- p.261
서울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이 ‘예술이 있는 지하철역’을 표방하고 국내외 작가와 건축가들의 예술 작품을 설치한 것은 2019년 3월이다. 서울시가 전문가들과 함께 꾸리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 프로그램에 녹사평역이 대상지로 선정됐다. 건축가이자 미술 기획자인 이재준이 기획을 맡은 이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제목은 ‘지하예술정원’이다. 국내외 작가 총 6명의 작품이 역사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어느 날 삶의 속도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작품들이 앞의 커플에게 그랬던 것처럼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올 것이다.
--- pp.274~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