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 추인에 이르는 ‘급작스러운 양위’ 사건의 일련의 경과를 보면 굳이 막부 권위의 실추를 감수하면서까지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천황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의문을 품게 된다. 바꿔 말하면 막부가 왜 그렇게까지 천황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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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센고쿠시대에는 천황이라는 존재가, 지극히 중대한 국정상의 권능을 회복하고 획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벌과 사적 추토에 대한 윤지는 이른바 교전권의 승인으로, 크게 천황의 권위를 높였지만, 실질적 관인 서임권 등은 권위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력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15세기 이후는 천황의 권위회복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제시한 모식도模式圖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실제로 일부 권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제의 진전에 따라 천황은 일방적으로 무력화했다거나 센고쿠시대에 천황제가 몰락했다는 등의 학설은 피상적인 견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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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나가쿠테의 싸움은, 9일 오전 중에 결말이 났다. 이에야스의 대승리였다. 그리고 신속하게 병력을 되돌려 재빨리 오바타성으로 들어가게 하였다(『미카와 이야기』)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처럼, 이에야스는 승리의 함성을 지를 틈도 주지 않고, 전군을 기민하게 전투 장소에서 철수시켜 오바타성에 집결시켰다. 승리에 취해 나가쿠테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면 귀중한 대승리가 참담한 패배로 끝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이에야스가 군략가로서 비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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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했듯이 히데요시는 나가쿠테 전투의 뼈아픈 패전과 ‘이에야스 콤플렉스’로 인하여, 관백 취임 및 왕정복고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 길을 택한 이상,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율령제적인 원리가 따라다니는 것은 불가피하다.
종래에는 관백이라는 지위가 공가사회 내부에서만 권위를 가졌으나, 그 지위에 히데요시가 앉음으로써 왕정복고(王政復古, 율령체계의 부활)라는 원리·이념을 매개로 정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가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권위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내린 평화령의 핵심은 새로운 계급 결집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천황의 권위를 전국 ‘60여 주’로 확장한 데 있다. 즉 히데요시의 평화령은 곧 천황의 평화령이었던 것이다.
--- p.122
히데요시의 통일전쟁은 천황의 명령에 따른 평화령, 관위로 여러 다이묘를 옭아매는 기미정책을 지렛대로 삼아 착착 달성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율령제적 원리의 부활을 통해서만, 히데요시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사실은 일본 무가정권 역사상, 이른바 봉건제의 발달사에 심각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기도 하였다.
--- p.136
히데요시가 구상하고 만든 일본의 국제는 그 최고위에 항상 천황이 존재한다고 하는 원리가 어디든지 따라다녔다. 포괄적으로 통관해보면 고대 율령제적 원리가 관철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히데요시의 통일 정권을 일종의 ‘왕정복고’라고 평가하는 이유이다.
--- p.162
그렇다면 이에야스가 두려워하고 경계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히데요리 관백 취임이 아니라 바로 마사무네가 우려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히데요리를 등에 업고 모반을 꾀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나아가 이에야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나 상황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도요토미 직계 다이묘를 우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딜레마가, 이런 곳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던 것이다.
--- p.185
천황이 정치·군사에 관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중세적 권력이라면, 이 단계에서 비로소 천황을 중심으로 한 역사에서도 근세가 시작된 것이다. 요시미쓰에 의해 14세기 말에 실현되었던 천황의 정치적인 권위에 대한 봉쇄는 약 200년이 걸려서야 재현되었다. 무로마치·센고쿠시대 천황 권위의 부활이라는 현상은 그만큼 용이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하겠다.
--- p.231~232
일련의 경과 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천황이 막무가내로 퇴위를 암시할 때마다 막부가 당황하여 수습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래의 관할기관인 소사대를 제쳐두고 이세伊勢 아노쓰安濃津 성주 도도 다카토라를 급파하여 공작을 펼치거나 노련함으로 잘 알려진 소사대 이타쿠라 요시시게를 굳이 교체하고 있는 것은 막부가 허둥대고 있는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 p.294~295
“여성 천황이 즉위하지 않은 지 오래인데다가 특별히 여성 천황의 세상이 태평스러웠던 예가 없다”라고 하여, 여성 천황에 대하여 의심스러워하는 마음을 표명한 것이다. 막부가 여성 천황의 즉위를 환영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 p.335
권력을 집중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던 에도 막부가 그 권위가 실추되는 상황을 감수하면서 여성 천황의 천조를 묵인한 것은 아무래도 기이한 일이다. 문제는 공의(公儀, 근세막번제近世幕藩制)에 있어서 천황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 p.357
막부는 한편으로 조정의 권위를 포섭하면서 존왕 운동을 억압하려고 하였지만, 외압이 격화되는 속에서 모순을 얼버무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안으로부터 국학존왕론國學尊王論이 급격히 대두하는 한편, 밖에서는 1853년(가에이 6)에 페리의 내항을 계기로 외압이 거세지는 가운데 막부를 타도하려는 운동의 불길이 치솟았다. 판도라의 상자는 일단 열리면 수습이 되지 않는 것처럼, 왕정복고를 근간으로 하는 메이지유신을 맞이하게 된다.
--- p.366~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