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삶은 십자가가 그려진 도화지가 아니라, 십자가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오려낸 삶이다. 오려낸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암덩어리 같은 액세서리일 게 뻔하다. 그러니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포기하라는 것은 목이 아니라 목걸이고 손가락이 아니라 반지인데도, 목과 목걸이 손가락과 반지를 하나로 보니 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 p.66
사실 디도가 한 말은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아니다. ‘선교사님, 한동안 무너졌던 고린도교회의 예배가 바로 섰습니다.’ 이것이었다.대단해 보일 것도 없는 이 말에 바울은 사방에서 옥죄는 환난을 잊을 만큼 큰 위로를 얻는다. 어찌 보면 순진해 보일 수도 끓는점이 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예배가 바로서는 것만큼 감동적이고 대단한 소식은 없다. 우리는 예배를 무너뜨리는 데 실로 탁월하다. 반면, 예배를 다시 세울 힘은 전무하다. 그러므로 무너진 예배가 다시 섰다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방증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간파하며 큰 위로를 받은 것이다. … 그리스도인에게 위로는,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는 확증이 들리고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사실 외에 더한 위로는 없다.
--- pp.74-76
노바디(nobody)였던 자신을 섬바디(somebody)로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 다윗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대로 전하는 자들 말이다. 은혜 받은 자들이 다른 자들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고, 그들은 또 다른 통로가 되어 흐르고 흘러, 은혜의 유산이 지금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소개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 하나님께 기억된 자는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더라도 섬바디가 된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기억해 주시기 때문이다.
--- pp.188-189
“므비보셋처럼 사랑받고 다윗처럼 사랑하다” 중에서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같다. 하나님께 악하다고 정죄받은 세상과 십자가 공로로 의롭다 칭함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갈등이 바로 가인과 아벨의 갈등이다. 그러니 왜 세상이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지, 왜 우리를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하는지 이해될 것이다. 케냐 국립공원에 갔다가 공원 안에서 사자를 만났다고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동물원에 사자가 있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칭함받은 우리 아벨들이 지나야 하는 길에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자가 반드시 있다. 그러니 이 길에서 고난과 박해를 만났다고 화를 내는 것은 국립공원에서 사자를 만났다고 화내는 것과 같다.세상이 우리를 박해하고 핍박하며 미워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받는 것에 동의하지 못해서다.
--- pp.199-200
“세상이라는 가인을 향한 마음” 중에서사랑에 은사가 없는 사람은 조금 덜 사랑해도 되고, 기도에 은사가 없는 사람은 기도에 게을러도 상관없을 것 같은 이런 표현은, 결국 ‘나는 복음의 조각만을 살아내겠다’와 같은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조각 예수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지 조각 복음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다. … 하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정도의 하나님은 아니고, 예수님은 한가롭게 일개 선교사의 발걸음에 온 힘으로 함께할 정도는 아니며, 성령님은 그분이 말씀하신 성령의 열매를 한 사람에게 모두 싹트게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지는 않을 것이고, 복음은 성경이 말하는 그 정도의 복음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온전한 복음을 살아내지 못해 가슴 치며 무릎 꿇었던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덜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알다시피 하나님은 그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다. 상상을 초월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이다. 발락과 사탄이 그 정도의 하나님은 절대 아니라고 우겨도, 지상 최고 난이도의 열방이자 땅 끝인 나를 선교하신 하나님이 아닌가.
--- pp.246-247
“복음의 목적을 위해 달려가다” 중에서어느 날 잔잔하다고 믿었던 삶에 돌 하나가 날아와 출렁임과 울렁임을 만들었다. 안에서 일어난 파문은 차츰 옆으로 뒤로 움직여, 나뭇잎을 밀어내듯 가까웠던 것을 밀어내고는 멀리 있는 것을 파도에 실어 가까이 데려왔다. 모든 것이 뒤집히고 역전되는 순간이다. 예기치 않은 파문, 이것을 경험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 p.248
“챕소노이에 피어난 복음의 꽃” 중에서조금 덥거나 못사는 나라로 떠나야만 복음을 아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자가 크리스천이다. 피부색이 까만 사람들과 있어야만 그림이 되는 선교지가 아니라, 넥타이를 목 끝까지 매고 세상의 신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건물의 어느 사무실이 우리의 선교지다. 중요한 것은 요단강 동쪽에 터를 두지만 요단강 서쪽의 모든 전쟁에서 선봉에 섰던 자손들처럼, 하나님의 전쟁에 최선을 다해 참전하고 있냐는 것이다.
--- pp.263-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