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입을 모아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니, 단순한 응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주문이 난무했다.
“헌석, 어퍼컷 어퍼컷, 왼손 가드 하고.”
“헌똘, 날려! 날려!”
“헌석아, 옆구리 비었어.”
왜 다들 내 이름만 불러 댔을까? 아니면 내 귀가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걸까? 분명 반 아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나를 불렀다. 덕분에 그 순간만큼은 내가 영웅이 된 것 같았다. 아이들의 넘치는 환호에 우쭐해졌고 주목받는 순간 황홀했으며, 그러므로 내가 날리는 주먹의 명분이 확실했다.
--- p.16, 「폭력의 탄생」
다연이는 얼굴이 이미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어 자칫하면 쓰러질 기세였다. 그래도 눈빛만은 내가 그 종이를 떼어 내 주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빛났다. 하지만 우리 등 뒤로 아이들이 겹겹이 서 있어서 그것만 떼어 냈다가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나는 포스트잇 일부를 뭉텅이로 잡아뗐다.
“야, 숏컷! 네가 뭔데!”
“숏컷, 너 페미 첩자냐”
등 뒤에서 여러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교실로 서둘러 직진했다.
--- p.60, 「숏컷」
“그러니까 넌 에이미란 애의 파우치를 훔쳤거나 주운 거지.”
“아냐! 난 도둑이 아니야. 에이미는 내 친구라고!”
도둑이 아니란 말을 하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허겁지겁 진실이 나왔다. 그러자 그 애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넌 친구의 시를 훔친 거니까 도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했는지 와닿았다.
--- p.94, 「달콤 알싸한 거짓말」
“주경아. 그래서…… 네가 악어가 되고 싶은 거였구나.”
“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냥 한 대 맞은 기분이랄까?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하고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그냥 희찬의 진심이 확 와닿으면서 왈칵 눈물이 났다. 그동안 내가 쌓아 둔 벽돌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너 힘들어서…… 그래서 그동안 악어처럼 숨어 있고 싶었구나. 힘들었겠다…….”
--- p.120, 「너와 짝이 될 수 없는 이유」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린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변화는 낯설어서 싫기도 하지만, 그 안에 다른 맛도 있다. 변화된 모든 것과의 익숙함. 그렇게 한발 한발 어딘가로 가는 거겠지. 그래, 어차피 난 이지은이고 걘 이지흔이니까.
--- p.150, 「낯선, 다른 맛」
심장 안에서 쿵, 하면서 마치 입간판 같은 게 자빠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들 알겠지만 입간판은 자빠지기 전에 미리 예고하지 않는다. 항상 갑자기 느닷없이 쾅!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동안 집에서 엄마 아빠가 악다구니를 쓰면서 싸울 때면 나 역시 욕지거리를 하듯이 ‘으휴, 차라리 이혼을 하지!’라고 속으로 외쳤지만, 그건 싸우지 말라는 바람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이혼이란 것의 실체가 그야말로 ‘레알’로 내게 이렇게 덜컥 오다니.
--- p.166, 「터널 통과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