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음악 같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음악도 삶도, 러닝타임이 정해져 있고 언젠가 끝날 테지만, 1절과 2절, 간주 중을 겪으며 플레이된다. 가끔 씹히거나 튀거나 끊기거나….
--- p.8
아무리 세상이 발달해도 ‘늘어진 테이프 플레이어’는 발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p.14
어느 바다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잊으면 어떡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바다였는지는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멜로디가 떠올랐던 순간의 기분뿐이다.
--- p.25
여기에는 바다가 있었고 기타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를 격려해 준 마음이 있었다. 나와 기꺼이 작업을 함께해 준 친구의 환대가 있었고 바쁜 일정 속에서도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성실이 있었다. 이 곡 속에서 나는 조금도 이방인이 아니었다.
--- pp.30-31
그 곡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이런 느낌이다. 필름이 거꾸로 감기며 시간이 1990년대의 어느 오후로 옮겨가고, 비디오를 보고 있는 내가 보인다. 영화는 슬프고 노래는 신나는데, 문득 마음속의 무언가가 움직인다. 유년 시절 내내 움직이지 않던 무언가가.
--- p.35
너무 경쾌해 미키마우스 만화처럼 느껴지던 리듬과 노래. 〈붐!〉의 사운드가 해맑은 만큼 거기에는 유년 시절이 그렇게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진실,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는 씁쓸한 진실이 스며있었다.
--- p.45
폭풍이 부는 바깥과 상관없이 고요하고 따듯한 바닷속 문어의 정원을 떠올린다. 아무도 우리를 찾을 수 없다고, 그러니 우리는 모두 이곳에서 행복하고 안전할 거라고 믿는다. 그때의 순간이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리라 여겼다. 어쩌면 조금 왜곡된 형태로. 보다 좋게 혹은 그에 비하지는 못하게 말이다. 그건 사실이었다.
--- pp.57-58
희망만을 말하는 가사는 어쩐지 현실성이 없다고 여겼다. 함께 행복하고 서로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그런 꿈들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소망하는 이의 마음은 다를 것이다.
--- p.59
그 시절 진열대에서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던 느낌을 잊지 못한다. 나는 음악을 ‘갖고’ 싶었다. CD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구석에 쌓아두면 그날은 새벽 출근도 버겁지 않았다. 그 일련의 과정들, 퇴근길 꽉 막힌 도로와 레코드숍의 부산스러움, 침대에 누워 CD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까지.
--- p.69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 있다. 편집된 것처럼 통째로 사라진 시절. 그때 들었던 음악은 위로나 응원이 아닌, 그렇게 그 시절을 지나가도 된다는 수신호 같았다. 너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일종의 대답 같은.
--- p.71
간절한 마음 하나가 잘 포개져 있는 노래를 들으면 나 역시도 차분해졌고, 내 절박함에 조급해하지 않고 나를 건강히 다룰 수 있었다.
--- p.83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자신의 눈금이 생긴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깊이 새긴 자신의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 이름은 내가 동경하는 사람의 이름이고, 그 이름에 귀를 기울이면 종소리가 들리는 노래가 흐르고 있다.
--- pp.87-88
아빠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나를 둘도 없는 친구로 여겼다. 산부인과에서 나를 데려와 아빠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헤드폰으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준 것이었다. 그 장면은 아직 사진으로 남아있어, 나는 헤드폰에서 어떤 음악이 재생되었을지 상상해 보곤 한다.
--- p.95
그럴 때면, 이런 작은 순간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작은 순간들이, 그런 것을 기다리며 사는 게 그게 어쩌면 행복이라면.
--- p.101
어떤 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의 음악을 떠올렸다. 나는 피식 웃음처럼 소파에 몸을 던진다. 소파에 구겨진 채로 그 시절의 음악이 고작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그널 음악이라니. 비웃는다. 하고많은 음악 중에서. 아니야. 그것은 마침내 꺼지는 극장의 불빛. 무언가 시작된다는 신호. 그래서 나는 그 음악을 잊지 못하는 거야. 그 음악을 떠올리고 마는 거야. 그것은 내 한 시절의 끝. 그리고 첫 음악.
--- p.112
그날 이후 그해가 저물 때까지 나는 닳도록 그 노래를 들었다. 어떤 마음인지, 어떤 감정인지 그런 것을 살피지 않았다. 더는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들으면서, 그가 알려준 것과 내가 듣고 있는 것 사이 어떤 닮음이 있는지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지.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거짓말처럼 십이월이 지나고 나는, 다시는 그 음악을 듣지 않았다. 무언가 뚝, 하고 끊어졌으며 다시는 이어지지 않았다.
--- p.116
나를 압도한 이 모든 걸 합친 것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밴드의 로고와 앨범 표지였다. 변화무쌍한 글자 모양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 p.123
‘표지만 보고 골랐는데 알고 보니 명반’이 여럿 있다. 디자인이 좋은 표지에 끌리는 건 아니었다. 모든 요소가 어리숙하지만 왠지 모르게 끌리는 음반도 있었다. 그 끌림에 작용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뭔가 있었다. 어떤 사람한테 어울리는 표정이나 옷이 있듯이 음악에도 걸맞은 형태가 있음이 분명했다.
--- p.128
노래자랑이 흐를수록 술자리의 한국 대중음악사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정태춘을 넘어 조용필로, 또 송창식으로, 어쩌다 김민기나 양희은으로, 종종 박인희로, 그러다 한대수나 신중현으로. 노래방이 없던 그 시절, 우리들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가사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던가. 얼마나 다양한 창법과 개성 넘치는 곡 해석이 난무했던가.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는 노래도 있지만, 노래방이 죽인 낭만과 즐거움은 얼마나 허다한가.
--- p.146
그 노래는 몇 달 뒤, 다시 온 정열과 눈물과 한숨과 긴긴 기다림의 시간을 다 바친 또 한 편의 공연을 무대 위에 무사히 올리고, 또 마치고서야 부를 수가 있다. 그 시절 우리에겐 성스러운 노래였다. 그런데, 나는 그 노래를 몇 번이나 목이 터져라 불러 보았던가?
--- 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