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오늘의 한국 사회는 내부적으로 치열한 프레임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이 전쟁의 목표는 땅과 같은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라, ‘정의’, ‘자유’, ‘평등’, ‘공정성’, ‘안전’, ‘책임’, ‘차별’ 등 가치를 담은 개념의 해석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좌파 대 우파’의 대결이나 ‘독재 대 민주’의 대결은 개념의 해석을 둘러싼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념 전쟁은 곧 프레임 전쟁이다. 개념의 해석은 프레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프레임과 은유는 둘 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구조물로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프레임 전쟁이 곧 은유 전쟁이다.
--- p.8
레이코프와 존슨은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우리의 사고 과정 대부분이 은유적이며,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도 당연히 은유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언어적 사례뿐 아니라 예술, 영화, 의례 등의 비언어적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은유는 사고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지 기제이며 개념적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새로운 학설은 ‘개념적 은유 이론(conceptual metaphor theory)’이라 불린다.
--- p.16
은유는 단순히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넘어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를 결정할 수도 있다. 이 책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는 교육, 경제, 국제 관계, 성과 사랑, 사회적 재난, 개신교 세계관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언어 표현들을 분석함으로써, 추상적 개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은유로 살아가고 있는지, 은유가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더 분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p.22
소수의 승자만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시장 만능주의 무한 경쟁의 극단적 형태인 전쟁의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보는 [교육(입시)은 전쟁] 은유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이 은유는 하루속히 폐기하고 다른 관점의 은유가 우리의 사고 속에, 우리의 삶 속에 뿌리내리도록 우리 모두가 전력을 다해야 한다.
--- p.40~41
‘세금 폭탄’은 그 어구를 도입한 보수뿐 아니라 진보도 별다른 성찰 없이 그대로 사용한다. 중산층 봉급자의 세율 부담과 간접세 확대를 통해 세수 부족을 메우려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꼼수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우리는 ‘세금 폭탄’이라는 어구를 공적 담화의 장에서 추방해야 한다. 초부유층의 세금을 깎아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려는 보수적인 정부를 비판할 목적이라 할지라도 ‘중산층과 서민에 대한 세금 폭탄’과 같은 어구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표현의 반복적인 사용이 세금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공포 이미지를 조장하는 보수의 ‘폭격’ 프레임을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 p.84~85
의료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활동이지만, 전쟁은 선제 타격에 의하든 대응 타격에 의하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살상하고 유구한 문화유산과 삶의 토대인 사회 기반 시설을 파괴한다. 이러한 점에서 [전쟁은 의료] 은유는 실재를 심하게 왜곡한다. 한마디로, 이 은유는 한반도 북쪽에 사는 동포들뿐 아니라 남쪽 우리의 생명도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도 ‘외과 수술적 선제공격’이나 ‘예방적 타격’을 언어생활에서 계속 사용해야 할까?
--- p.116
2015년 말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창조적 대안을 이끌어냈다고 발표한 합의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분노했다. 합의문에는 국가가 자행한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의 법적인 책임을 묻는 내용도, 일본 정부가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는 내용도 없었다. 우리 정부 관계자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진정으로 감정이입을 했을까? ‘위안부’ 피해자들을 처치 곤란한 ‘물건’으로 본 것은 아닐까?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재단에 일본 정부가 내기로 했다는 10억 엔의 기금을 ‘어떤 이름의, 어떤 성격의 돈’이라고 생각하고 덜컥 합의했을까? 한마디로, [위안부는 물건] 은유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적게는 3만 명에서 많게는 22만 명에 이른다는 여인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죽음을 초래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밑바탕에 깔린 은유─[성적 상대자는 물건(음식)]─를 한국인들이 별다른 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그것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은유적 사고가 개개인은 물론 사회적 의식 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 p.149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이러한 배타성의 강화는 우리를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빠뜨리며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더 나아가 차별과 소외에 그치지 않고 ‘밖’의 수많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실제로 우리는 기업이 최대한의 이익 추구를 위해 위험한 일을 ‘밖’의 사람들─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인─에게 맡기는 ‘위험의 외주화(外注化)’에서 이러한 안타까운 죽음을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삶은 전쟁]이 아니라 [삶은 모두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모두가 연대할 때에만 깨뜨릴 수 있는 이 배타성은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안 그러면 누구든 ‘안’에서 ‘밖’으로 밀려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카이대’나 ‘인서울대’라는 신조어가 발붙일 수 없는 세상은 꿈속에나 있을까?
--- p.216
‘전두환’과 ‘4대강 개발’, ‘동성애’라는 쟁점 외에도 한국의 개신교는 사형제, 낙태죄 폐지, 난민, 타 종교, 종교인 과세 제도, 대북 관계, 대일 관계 등 세계 내의 동일한 수많은 현상을 두고서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다. 더 상세하게 파고들어 보아야 하겠지만, 각각의 쟁점에 대한 보수 기독교인들과 진보 기독교인들의 대립적인 인식 역시 성서를 해석할 때 엄격한 아버지 가정의 도덕성 체계와 자애로운 부모 가정의 도덕성 체계 중 어느 체계를 적용할 것인지와 관련이 있을 터이다.
--- p.247~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