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타임스 선정 ‘주목할 만한 도서’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 57주 연속 베스트셀러·전 세계 20여 개 국어로 번역 출간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작품마다 각 캐릭터의 면면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탁월한 이야기 구성력과 인간에 대한 도덕적 암시를 내포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정평이 나 있다. 인간의 죄와 책임의 문제를 꾸준히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온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경이로운 베스트셀러인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 이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중단편 모음집 『다른 남자』를 펴냈다. 『다른 남자』에는 부자, 부부, 친구 등 우리 일상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빛과 그림자가 매우 간결하고 치밀한 어조로 그려져 있다. 특히 탁월한 것은 슐링크가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관계와 소통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프리즘에 포착된
사랑의 여섯 가지 빛과 그림자
사랑의 다른 이름 하나. 연민
196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는 〈소녀와 도마뱀〉은 하나의 예술작품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 낮잠을 자곤 하던 아버지의 서재에 걸려 있던 그림에 대한 소년의 애틋한 사랑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인이다. 그 그림에는 어느 유대인 소녀와 도마뱀이 그러져 있다. 소년은 그 소녀를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가슴속에 간직하며 사랑한다. 그의 사랑은 성장하며 더욱 깊어진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소년은 그림의 비밀을 캐게 되고 그 과정에서 2차 대전 중 아버지가 유대인들에게 범한 죄를 알게 된다.
“아버지는 형법전에 나오는 구절을 그대로 베꼈어요. 아버지는 자신이 처벌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 구절들을 베낀 거예요. 하지만 그 글은 아주 섬뜩해요. 모든 것을 시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법적으로 처벌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읽히거든요. 그것은 마치 음식에 독을 집어넣었음을 시인하면서도 요리책에 있는 설명대로 요리했을 뿐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아요.”
아버지의 죄를 알아낸 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아버지를 부정하는 아들의 행동은 아들을 부모 세대가 저지른 죄과에서 벗어나게 해줄까? 이 지점에서 슐링크의 대답은 명확해 보인다. 그렇지 않다. 그 이후의 세대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슐링크는 현재 독일의 아버지 세대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연민의 정을 그림을 통해 그려낸다. 아버지가 사랑했던 것에 대한 사랑은 곧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오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그 영향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의 다른 이름 둘. 어긋남
〈외도〉는 독일이 통일되고 동독과 서독이라는 이질적인 집단들이 하나의 집단이 되어가는 중에서 사람들이 겪는 오해와 화해에 이르는 길을 다루고 있다. 한 (나약한) 지식인 남편이 겉으로는 자유가 흐르지만, 그 이면에 아직 통제가 존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아내를 지키고자 하는 단순한 바람 하나 때문에 동독의 비밀경찰에게 아내와 친구의 정보를 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남편이 생각하는 사랑과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서로 다름을 절감하게 된다.
“당신은 원래의 내 모습대로의 나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미에 맞는 나를 구한 거예요. 무해한 여자, 잠자리에서 최고인 여자,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 없는 여자 말이에요. 그것이 당신이 구해낸 내 모습이에요. 실제의 내 모습이 어떠한가 따위는 당신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기준에서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은 아내가 비밀경찰에 체포된다 하더라도 아내의 신념과 자주성의 권리를 지켜주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는다면, 협상으로 아내를 빼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순간에도 옆에서 묵묵히 믿고 지켜봐주어야 할 일이었다. 남편과 어긋난 아내는 실망감과 허망함에 남편의 친구와 하룻밤을 보낸다. 이로써 그들 부부관계는 끝인가 싶지만, 삶이란 것이… 사랑이란 것이 한 방향의 직선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고비와 전환점들을 맞으며 방향이 바뀌는 것이어서, 둘의 다른 지향성은 갈등의 고비를 겪으면서 서로를 향해 방향이 서서히 일치하게 된다.
사랑의 다른 이름 셋. 질투
〈다른 남자〉에서 슐링크는 죽은 아내가 숨겨두었던 애인이 아내 앞으로 보낸 편지를 받고 질투심을 느끼고, 아내의 옛 애인을 만나 이야기하는 가운데 자신의 과거를 깨달아가는 남자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그’는 현실에서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밖에 보지 못하고 늘 불평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이다. 그것을 슐링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불만이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과거의 삶을 야금야금 파먹고 있었다.” 사기꾼에다 허풍쟁이로 모든 것을 미화하여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른 남자’는 유용성과 효율성과 적법성만을 신조처럼 믿는 주인공 ‘그’의 대척점으로 등장한다. ‘그’와 ‘다른 남자’를 대조시키며 슐링크는 일상적인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삶의 허구성을 짚어내고 독자로 하여금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랑의 다른 이름 넷. 이기적인 열정
〈청완두〉의 한 남자는 현재와 사랑에 지극히 충실하다. 그는 하나의 사랑에 집중하다가, 그 사랑이 지겨워질 때쯤 다른 사랑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전 사랑을 정리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의 열정은 여기서 저기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이동하지만, 시간을 함께한 사랑은 그에게 필요로 남겨지고, 그 필요 때문에 그는 이기적이게도 과거의 사랑을 정리하지 않는다. 싫증난 사랑에서 다른 사랑으로 도피하는 것에 지친 그는 집을 훌쩍 떠나 수도사가 될까도 고민하지만, 그의 ‘수도사 되기’는 미수에 그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우리는 당신의 엉뚱한 짓에 모두 진절머리가 나요.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고, 도피 행각을 눈감아주고, 변덕을 참아주고, 멍청한 얘기에 귀기울여주었지만 이젠…….”
여인들은 그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를 더욱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협동 단결해 그를 책임의 울타리에 가두어버린다. 사랑이 열정과 신뢰와 책임이 적절히 배합된 어떤 것이라면, 그가 여인들에게서 빼앗은 열정과 신뢰를 여인들도 똑같이 그에게 되돌려준다.
사랑의 다른 이름 다섯. 근원적인 그리움
〈아들〉은 인생에서 자신의 일만 중요하게 여겨, 일 외에는 어느 것 하나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미루고만 있다가 이혼한 한 남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에게는 아내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과 함께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단력 있게 아들을 선택하지 못하고, 아내의 새로운 남편과 아들에게 멸시의 시선을 받으며 초라함을 느끼고, 다시 일에 매달린다. 하지만 그는 “그래, 이건 오히려 그 아이에게 더 나은 거야”라며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미화시킨다.
그런 그가 우연히 다른 사람을 대신해 전쟁 중인 지역에 협상인으로 가게 되는데,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사고를 당하게 된다. 마지막 생명의 빛이 명멸하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 그에게 절실히 떠오르는 단 하나의 기억은 바로 자신의 밀쳐내는 ‘아들’이다. 슐링크는 이〈아들〉을 통해 ‘사랑’의 가장 원초적인 그리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품 배경도 1990년대 후반으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이다. 복잡한 현대만큼이나 복잡한 사랑의 모습 속에서 꾸며지지 않은 가장 근원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사랑의 다른 이름 여섯. 낯설음
〈주유소의 여인〉에는 누가 봐도 행복하게 살아온 한 부부가 등장한다. 젊은 시절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중년이 되어서도 서로에게 신뢰와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부부. 어느 순간 남편은 자기 안에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신뢰와 책임만이 남아 있고 열정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 열정을 되찾고자 한다. 중년의 부부는 서로 안에 잠든 상대를 향한 열정을 깨우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새로운 장소에서 보는 아내의 모습 역시 생기가 넘치고 그의 열정을 깨운다.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기뻐하는 그녀, 그녀는 그런 것을 가지고 그를 얼마나 자주 놀라게 하고 행복하게 했던가. 그는 요 몇 년 동안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번 여행길에 비로소 그녀의 붙임성이 되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그도 함께 기뻤다. 그녀는 그에게 포옹하며 말했다. “이제 다 끝났어요? 출발해도 될까요?”’
시간이 함께 쌓여 열정과 신뢰로 이루어진 사랑은 다시 뜨거운 열정으로 돌아가긴 아무래도 무리이다. 여행 중 계속 열정과 현실적 감정의 양쪽을 오가며, 결국 그는 아내를 뒤로 하고 완전히 낯선, 주유소의 여인에게 향한다.
과거에 유대인 이웃을 나치에 고발한 일이 밝혀져 판사직에서 물러난 아버지와 아버지의 비밀을 간직한 그림을 물려받은 아들, 친구와 아내 모두를 비밀경찰에게 팔 수밖에 없었던 한 나약한 지식인, 아내의 죽음 이후에야 진정한 한 여인으로서의 아내의 모습을 깨닫는 남자…… 등 상황과 시대적 배경은 여러 모습이지만, 이 모든 상황과 고민의 중심에는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슐링크의 궁극적인 관심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의 문제로 향한다. 그것은 이 중단편 모음집의 독일어 원제인 ‘사랑의 도피Liebesfluchten’?는 제목으로 드러난다. ‘사랑의 도피’는 ‘사랑으로부터의 도피’이면서 동시에 ‘사랑으로의 도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사랑으로부터 도피를 하고 또 사랑을 향해 도피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몸을 숨기거나 또는 도망쳐 나온 사랑은 어느 곳에나 있는 듯하지만 아무데도 없고, 때로는 구원이지만 때로는 영혼을 옥죄는 감옥이 되어 그들을 언제나 울고 웃게 만든다.
사랑의 근원을 캐는 감정의 고고학자,
사랑이라는 테마를 꼭짓점으로 죄와 책임의 문제를 묻는 베른하르트 슐링크
슐링크는 늘 죄와 책임의 문제를 자신의 문학적 테제로 변주하여 보여준다. 전후 독일의 도덕성 문제에 천착한 그는, 전후 세대의 입장에서 그 윗세대가 왜 그런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그것을 피할 수는 없었는지의 이유를 밝히는 데 주력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누구도 죄와 책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슐링크의 작품은 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증오에 대한, 나아가 세상살이 전체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로 보아도 무방하다. 바로 이 지점이 그의 작품이 독일적 상황을 넘어서 인간 보편적 성정에 호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감정의 고고학자’인 슐링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남자』에서 역시 슐링크는 유대인과 독일인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나치 시절 집단적 침묵에 따른 정신적 문제 등을 역사나 사회의 문제로 환원하여 이야기하지 않고, 개인들 간의 관계와 소통의 문제로 풀고 있기 때문에, 각 작품이 이야기가 일어나는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그것을 읽는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슐링크를 허구의 탈 뒤로 숨지 않고 작가적 진실성으로 독자들 앞에 나서는 작가로 평가한다. 그의 대표작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역시 독일의 역사를 냉정하게 직시함과 동시에 감정의 묘사가 너무나 섬세해서 슐링크의 실제 경험이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평론가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 문학계를 지배해오는 작가의 예술적 기예에 맞서 슐링크는 예술가의 솔직성을 고집한다. 이것은 현실 이면의, 어쩌면 더욱 잔혹할지 모를 진실을 아프지만 명확하게 짚어내게 한다. 특히 이야기의 진실성은 슐링크 자신이 68세대로서 각 이야기 주인공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는 데서 더욱 확실해진다. 슐링크의 작품은 진실성의 미학을 바탕으로 독일 문학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