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토대가 마음챙김입니다. 행복해지는 기본 조건은 행복한 상태를 우리가 의식할 줄 아는가입니다. 이미 행복함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행복해질 수 없겠지요. 치통이 있어야, 치통이 없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깨닫습니다. 하지만 치통을 경험해보지 못하면, 그것이 행복한 상태임을 알지 못하지요. 사실, 치통 없음은 평범하지만 너무나 즐거운 상태인 것입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너무나도 많지만, 마음챙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음챙김을 실천할 때, 이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법을 배웁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잘 가꿈으로써, 우리는 미래를 가꾸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 바로 미래의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어떤 목표도 없음」중에서
화를 내면, 자신이 바로 화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억누르거나 쫓아내는 행위는 자신을 억누르고 쫓아내는 셈이지요. 기쁠 때, 우리는 기쁨이 됩니다. 화낼 때, 우리가 화이지요. 자신 안에 화가 생겨날 때, 그것이 일종의 내면의 에너지임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에너지를 다른 종류의 에너지로 변용시키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해지지요. 퇴비통을 음식물 쓰레기로 채우면 거기에서 썩는 냄새가 나지만, 그 쓰레기가 나중에 아름다운 꽃들로 변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언뜻, 퇴비와 꽃은 정반대에 있다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보다 깊이 들여다보면 꽃에는 이미 퇴비가 들어 있는 셈이지요. 꽃이 썩기까지는 보름이면 충분합니다. 능숙한 정원사라면 자신이 만든 퇴비를 바라보며 이러한 진실을 꿰뚫어보기에, 슬퍼하거나 역겨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썩어가는 물질의 가치를 알기에 가벼이 여기는 법이 없지요. 퇴비가 꽃이 되기까지는 몇 달이면 충분합니다. 화를 다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원사의 이러한 통찰과 불이(不二, non-dual)의 관점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화가 일종의 퇴비가 될 수 있음을 알며,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탈바꿈할 힘이 거기 숨겨져 있음을 압니다. 정원사에게 퇴비가 필요하듯, 우리에게는 화가 필요하지요. 자신의 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안다면, 그 즉시 이미 약간의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완벽한 화의 변용이 가능하지요. 그것은 평화, 사랑, 그리고 이해가 됩니다.
---「화에 대한 마음챙김」중에서
우리는 난방과 조리를 위해 천연가스를 집으로 끌어다 씁니다. 이때 가스의 여여함을 잘 알고 있지요. 가스는 위험하다는 것을 압니다.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음을 알지요. 하지만 동시에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서는 가스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저 없이 그것을 집으로 끌어다 씁니다. 전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전될 위험은 상존하지만, 주의한다면 아무 문제없이 그것을 유용하게 쓸 수 있습니다. 바로 전기의 여여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지요. 이제 개인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어떤 개인의 여여함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면, 서로 매우 즐겁게 지내며, 그 관계 안에서 서로 유익을 얻게 됩니다. 열쇠는 그 사람의 여여함을 아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항상 꽃이길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쓰레기 같은 일면도 이해해야만 합니다.
---「여여함」중에서
1966년, 제가 베트남 전쟁 중지를 부르짖으며 미국에 있을 때, 한 젊은 미국 평화운동가가 제가 연설하는 도중 일어나 외쳤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 압제자 미국을 무찌르는 것이오! 당신은 여기 있지 말았어야 했소. 여기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이오!”
그를 비롯한 많은 미국인들이 평화를 원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평화는 자신들의 화를 달래기 위해 어느 한쪽 편이 패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쟁 중지를 요구해왔지만 그것이 관철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화가 났고, 급기야 자신들의 조국의 패배 외에 그 어떤 해결책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베트남인들은 실제로 폭격 아래 신음하기에 좀 더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평화만을 원했습니다. 누가 이기고 지는지는 관심 밖이었지요. 단지 폭격이 멈추기만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즉각적인 전쟁 중지 제안에 대해 평화운동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그 젊은이가 “고국으로 돌아가 압제자 미국을 무찔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양반,
제가 보기에 전쟁의 뿌리가 되는 많은 부분은 여기 당신 나라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와야만 했지요. 그 뿌리 중 하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바로 당신의 관점입니다. 양쪽 편 모두 잘못된 정책의 희생양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믿는 정책 말입니다. 베트남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 또한 원하지 않습니다.”
---「전쟁의 뿌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