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의 성공적인 소설들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 말고 ‘끝까지 답할 수 없는’ 질문 말이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내려놓음으로써
위안을 얻는다는 역설
임현의 소설은 대체로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로 가까운 누군가를 여의거나 곤경에 빠진 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표제작 「그들의 이해관계」는 버스 사고로 배우자 ‘해주’를 잃은 ‘나’가 우연히 그 사고를 피한 대신 경로를 이탈했다는 이유로 부당 해고를 당한 버스 기사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삶이란 “자꾸 나쁘게만 흘러가”(31쪽)고, 누군가 얻는 것이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는 무정한 세상사 이해(利害)의 법칙. 이 구조에서 ‘나’는 누구도 선인도 악인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 죽음을 피한 그 버스 기사를 탓하려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자신처럼 어려운 국면을 지나고 있는 버스 기사가 던지는 “어느 한쪽이 자꾸 좋아진다는 것은 누군가 나쁜 쪽을 떠안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27쪽)라는 고통어린 질문에 다만 귀기울일 뿐이다.
「그들의 이해관계」와 연결된 작품인 「나쁜 사마리안」은 상실의 상처를 지닌 두 인물이 얻는 위로의 순간을 좀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댐을 세우느라 물속에 잠긴 “수몰지구”(44쪽)처럼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은 죽은 해주에 대한 미련 때문에 함께 살고 있는 ‘도경’에게 미안함과 죄의식을 느낀다. 어느 날 ‘나’는 같은 대학 출신이면서 무명배우로 일하는 ‘오종구’가 밤의 번화가에서 혼자 울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시간이 지난 후 우연히 만난 오종구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나’는 어디서도 받지 못했던 종류의 위로를 받는다. 실은 오종구 또한 그날 ‘나’를 보고 있었는데 ‘나’ 역시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봐주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토록 많은 사람 중에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너무 외로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67쪽)
임현은 「나쁜 사마리안」을 통해 타인에게서 받는 위로란 어떠한 목적이나 의도 없이 다만 뜻밖의 상황에서 스치듯 전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러한 시선은 「해원」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배우자 ‘윤재’를 여의고 홀로 ‘노아’를 키우는 ‘해원’은 죽은 윤재가 했던 것처럼 노아와 공놀이를 하려다 그만 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배우자 없이 온 힘을 다해 보살피던 노아가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는 지금, 아이의 수술이 잘 끝나기를 바라는 일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달은 해원은 공원에서 잃어버린 공이라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곳을 지나던 공원 관리인이 발길을 멈추고 그런 해원을 보게 되는데, 그 시선은 마치 소설 바깥의 작가의 시선과 닮아 있다.
“관리인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돕는 것도 아니었다. 해원이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손전등 빛을 따라 옮겨줄 뿐이었다.”(92쪽)
애써 상대를 이해하려 들거나 섣불리 이유를 묻지 않고 한 발짝 거리를 둔 채 조심스럽게 지켜봐주는 이러한 태도를 임현은 주목한다. 「이해 없이 당분간」에서 이별을 치른 ‘나’가 한때 애인과 함께 자주 시간을 보냈던 시내버스에 올라탔다가, 문득 버스 기사가 이유를 알 수 없이 울음을 터뜨리며 “아무도 가보지 못한 노선으로”(138쪽) 달리는 것을 말리지 못하고 그저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가. (…)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따로 또 함께 울”(같은 쪽)고 말았다고 말하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장면처럼, 이러한 태도는 그 자체로 묘한 울림을 준다.
불편한 것을 외면하려는
인간 의식의 맹점을 걷어내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는 이야기
수록작 중에서 가장 최근에 쓰인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에서 임현은 공정과 불의, 잘잘못의 비율을 산정하기 어려운 윤리적 모순과 그 구조를 더욱 치열하게 파고든다. 재임용 계약을 앞둔 국문학과 시간 강사인 ‘나’는 최근 학교에서 일어난 법적 분쟁 사태를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121쪽)라고 생각하며 남 일 같지 않게 지켜본다. 한 역사학과 교수가 강의 도중 한 학생에게 인권 차별적인 발언을 했고, 학생회 소속이던 오명조가 그 교수에게 책임을 묻다가 폭행을 당한 일이었다. 오명조는 그 사건에서는 피해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학과 선배에게 “모멸감이나 수치심”(115쪽)을 주는 말로 그 선배를 휴학하게 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명조가 그 선배에게 내뱉은 말은, 놀랍게도 ‘나’가 오명조와 어느 수업 뒤풀이에서 오명조에게 스치듯 한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나’는 사실 그 때문에 이 사건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화자의 시점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모든 전말이 드러난 후에 다르게 읽히도록 한 겹씩 비밀을 풀어내며 읽는 이의 선입견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임현의 능수능란한 플롯은 「목견」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에서도 반복, 변주된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주민들에게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려 목숨을 끊은 데 대한 상처를 토로하는 마트 물류 직원이 실은 현재 모종의 사건을 일으켜 사측의 조사를 받는 중이었다는 설정(「목견」), 투자에 실패한 후 주차장 관리원으로 밀려난 노인이 어떤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설정(「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이 그렇다.
임현 소설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거나 쉽게 답할 수 없는 윤리적 난제의 어려움을 항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일에 대한 입장과 관점, 그 일의 의미를 좌우하는 것은 각자가 놓인 ‘상황’일 수밖에 없다”(해설, 245쪽)는 것,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이해(利害)를 좇고 마는 것, 언행불일치와 자기모순, 저 좋을 대로 기억을 편집하고, 남의 말을 곡해하며, 단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으며, 자신만이 옳다고 강변하는 것”이 “모두 눈앞의 상황을 견디는 ‘상황주의자’의 방어기제에 다름 아니”(해설, 249쪽)며, 그것이 바로 인간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진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진실을 직시하는 눈을 가질 때만이 우리 사회 곳곳에 붙은 “윤리 강령”(117쪽)처럼 현실에서 실체적인 의미로 기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되레 악덕을 포장하는 구실이 되곤 하는 ‘윤리’라는 말의 허상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자주 다른 사람을 내세우곤 했다. 그럴수록 어쩐지 더 많은 나를 말할 수 있었는데 소설을 쓰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늘 나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누군가를 통해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동시에, 나 역시 다른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가 되어주어야만 했으니까. 무엇보다 최초로 말을 시작하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최초로 듣는 사람은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_‘작가의 말’에서
겉으로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관계의 비의와 상처, 우리를 둘러싼 해명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모순에 더욱 귀기울여나갈 이 작가를 신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