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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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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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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7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420쪽 | 708g | 152*225*25mm
ISBN13 9788971996096
ISBN10 8971996099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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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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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에게 이순신, 김유신, 궁예, 항우, 악비, 장자방, 제갈공명, 나폴레옹 등 뛰어난 역사 인물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걸출한 개인을 흠모하는 성향이 있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한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남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것도 왠지 편하지 않다. 돈이나 권력보다는 지성과 지식을 가진 이를 우러러보며 내가 남을 부당하게 해치지 않는 한, 사회든 국가든 그 누구든 내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고등학생 시절 출세라는 것을 하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공부보다 정부와 싸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썼다. 야학에서 같은 연배의 노동자들을 가르쳤으며, 학생회 임원을 맡았다가 감옥 구경을 하기도 했다. 스물여섯 살 이후에는 주로 글 쓰는 일로 밥벌이를 했으며, 30대 중반에 독일로 유학을 가서 경제학을 더 공부했다. 40대에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점시 공직사회를 경험했다. “프티부르주아 계층의 대구·경북 출신 지식 엘리트로서 젊은 나이에 이름을 알리고 출세를 했지만 결국 정치에 실패한 후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 나는 나를 그렇게 규정한다. (18쪽)

안보국가에서 출발해 발전국가와 민주국가를 거쳐 복지국가로 나아간 것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보편적인 국가의 ‘계통발생’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을 정확하게 압축· 재현했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문명 발생 이후 호모 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다.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동일한 위계를 가진 동일한 욕망을 품고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리적 욕망’부터 충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인간 공동체인 국가도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
하는 데서 출발해서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간다. (57쪽)

우리 현대사는 난민촌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벌인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왜 자매가 아니고 하필 형제냐고, 이것도 성차별이 아니냐고 하진 마시라. 자매보다는 형제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경우가 더 흔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4?19보다는 5?16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4?19를 좋아하고 5?16을 미워한다. 둘 모두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둘 모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4?19를 좋아하는 것은 4?19를 만들어낸 욕망과 4?19가 만든 변화를 5?16을 일으킨 욕망과 5?16이 만든 변화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7~68쪽)

1978년 1월, 입학시험을 보러 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는 교문이 없었다. 데모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동숭동에 있던 캠퍼스를 관악산 아래 골프장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등산객이 드물었고 관악산 계곡에서 신림동으로 흐르는 개천 여기저기에 판잣집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신림사거리로 가는 길은 비포장이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포항제철의 철강생산 능력을 보여주는 대형 철제 교문이 들어섰다. 국립서울대학교를 나타내는 ‘ㄱㅅㄷ’을 기하학적으로 결합해 만든 교문을 우리는 ‘공산당’ 또는 ‘계집 술 담배’의 약자라며 낄낄대곤 했다. 학교 앞 개천이 복개되었고 판잣집은 철거되었으며 신림사거리로 가는 길도 깨끗하게 포장되었다.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2만 원짜리 봉천동 달동네 자취방은 블록벽돌로 지은 집이었다. 여름에는 더웠고 겨울에는 냉기가 그대로 들어왔다. 연탄으로 구들장을 데웠고 석유곤로로 밥을 해먹었다. 전기장판과 전기밥솥이 나왔지만 전기요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쓰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적인 경제생활은 내가 초등학생 시절 보았던 것과는 아주 크게 달라졌다. 차이는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10년 전보다 훨씬 잘살게 되었다.
이것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부터 10?26사건이 터진 1970년대 후반까지 내가 본 경제생활의 변화였다. (108~109쪽)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은 곧바로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 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시민들은 더 높은 수준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 면에서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188쪽)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년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후일 6?3사태를 주도한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소속 학생들이 참석한 이 토론회에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이 젊은 정치인은 외국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고 수구사상, 사대주의, 급진적 서구사상과 자유방임적 퇴폐를 탈피하며 정서적으로는 ‘양키즘’을 배격하는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박정희를 ‘민족적 민주주의’에 따른 조국 근대화의 추진 주체라고 추켜세웠다. 공화당은 곧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의원 정수의 60퍼센트가 넘는 110석을 차지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 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194쪽)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 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대오 한가운데서 누군가 ‘십 원짜리’, ‘백 원짜리’ 욕을 섞어가며 학생회 지도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는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심상정. 아, 저 친구가 여러 학회의 여학생들을 모아 별도의 서클을 만든 다음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무림’의 남자들을 열 받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심상정이구나. “예쁜 입술에서도 험한 소리가 나오네요!” 그렇게 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 뒤 6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 4?3사건,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225~226쪽)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전국에서 1,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시위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주한미군방송AFKN이 미군과 군속, 가족들의 외출자제령을 보도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긴급친서를 보냈고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서울에 왔다. 6월 24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되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 정치인 김영삼의 모든 모습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257쪽)

한국의 전후 베이비부머들은 한국기생충박멸협회는 몰라도 대변검사는 안다. 그들에게 대변검사는 즐겁지는 않지만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처음 채변봉투를 받은 것은 한국기생충박멸협회와 문교부가 학생들에 대한 집단 기생충 검사를 시작한 1969년,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조그만 흰색 종이봉투 안에 더 작은 비닐봉지가 들어 있었다. 나뭇가지로 대변을 찍어 비닐봉지에 담고 인적 사항을 기재한 종이봉투에 넣어 제출했다. 결과가 나오면 담임선생님과 양호선생님이 교실을 돌면서 기생충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른 약을 주었다. 반 친구들 태반이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약을 먹어야 했다. 나는 회충약을 받았는데, 한 주먹이나 될 만큼 양이 많아서 먹는 게 아주 고역이었다. (298쪽)

고용보험법은 1990년 제7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에서 검토하기 시작했고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제정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총애했던 이인제 노동부장관은 전경련과 경총, 보수언론의 엄청난 비난에 굴하지 않고 1995년 7월부터 종업원이 30명 넘는 모든 기업의 상용근로자를 피보험자로 하는 시행령을 확정함으로써 고용보험을 출범시켰다. 이때가 정치인 이인제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빨갱이라는 욕설에도 주눅 들지 않고 소신을 관철했다. 경선불복과 잦은 당적변경 사실을 두고 그를 비웃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고용보험을 만든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정치인생은 의미가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347쪽)

우리 세대는 반공백일장을 하고 반공포스터를 그리고 반공표어를 짓고 반공웅변대회와 반공궐기대회를 하면서 자랐다. 초등학생 때부터 간첩을 식별하는 방법을 배웠다. 새벽에 구겨진 양복을 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찾아온 친척, 심야에 북한 방송을 듣는 사람, 직업이 없는데도 고급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신고해야 한다고 배웠다. 혼자 여관에 투숙하면서 ‘아가씨를 부르지 않는 사람’을 의심하라는 ‘19금 식별법’도 있었다. 제일 널리 퍼진 반공 표어는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표어는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지 다시 보자”였다. 우리는 평범한 시민들이 이웃을 간첩으로 의심하도록 권하는 세상을 산 것이다. 학생들의 반공궐기대회 강제동원은 없어졌지만 반공포스터 그리기는 요즘도 여전한 모양이다. 최근 어느 초등학교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반공 포스터가 무척 깜찍했다. “포스터 그리기 지겹다 통일해라.” (363쪽)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최초 폭로한 인물은 조갑제 기자였다. 그는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에 이수근 사건을 심층 보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극우 지식인’ 조갑제 씨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형수의 인간적 진실을 탐사한 민완기자였
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건조하고 날렵한 조갑제 기자의 문장과 날카로운 시선을 무척 좋아했다. (366~367쪽)

서독은 동독을 흡수통일하려고 한 적이 없다. 동독 국민이 원하고 동독 정부가 결단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교류 협력하고 지원했을 뿐이다. 동독이라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려 하지 않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안정적으로 관리한 것이다. 서독은 그렇게 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으며 동독 정부의 무장을 해제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브란트 총리가 펼쳤던 새로운 동방정책의 한국적 버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같은 관점에서 평화공존과 높은 수준의 교류협력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대한민국 헌법이 명하는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에 이르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길을 찾으러 굳이 머나먼 드레스덴에 갈 필요는 없었다. (406쪽)

세월호의 비극은, 어쩌면 우리에게 올지도 모를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국민들이 이렇게 많이 슬퍼하고 미안해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나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보다 슬픔은 더 깊었고 분노는 더 뜨거웠으며 아픔은 더 컸다. 도대체 무엇이 지방선거 후보 경선 등 정당의 행사는 물론이요 지역축제와 동호인 행사까지 군말 없이 취소하게 만든 것일까? 나는 그것이 연민, 죄책감, 미안함 같은 감정과 희생자들의 고통에 대한 공명共鳴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과 유가족에 대한 연민,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사랑과 우정에 대한 공감,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탐욕과 부패의 구렁텅이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겪어야 했던 혹심한 고통에 대한 공명이다. 만약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오늘보다 더 훌륭한, 최소한 지금보다 덜 추한 대한민국에서 살게 된다면, 그런 대한민국을 만드는 힘은 바로 이 죄책감과 공명에서 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415쪽)
--- 본문 중에서
안보국가에서 출발해 발전국가와 민주국가를 거쳐 복지국가로 나아간 것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보편적인 국가의 ‘계통발생’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을 정확하게 압축·재현했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문명 발생 이후 호모 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다.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동일한 위계를 가진 동일한 욕망을 품고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리적 욕망’부터 충족한 다음 더 고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인간 공동체인 국가도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 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간다. (57쪽)

우리 현대사는 난민촌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벌인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왜 자매가 아니고 하필 형제냐고, 이것도 성차별이 아니냐고 하진 마시라. 자매보다는 형제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경우가 더 흔하지 않은가. / 어떤 사람들은 4·19보다는 5·16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4·19를 좋아하고 5·16을 미워한다. 둘 모두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둘 모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4·19를 좋아하는 것은 4·19를 만들어낸 욕망과 4·19가 만든 변화를 5·16을 일으킨 욕망과 5·16이 만든 변화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7~68쪽)

1978년 1월, 입학시험을 보러 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는 교문이 없었다. 데모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동숭동에 있던 캠퍼스를 관악산 아래 골프장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등산객이 드물었고 관악산 계곡에서 신림동으로 흐르는 개천 여기저기에 판잣집이 있었으며 학교에서 신림사거리로 가는 길은 비포장이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포항제철의 철강생산 능력을 보여주는 대형 철제 교문이 들어섰다. 국립서울대학교를 나타내는 ‘ㄱㅅㄷ’을 기하학적으로 결합해 만든 교문을 우리는 ‘공산당’ 또는 ‘계집·술·담배’의 약자라며 낄낄대곤 했다. 학교 앞 개천이 복개되었고 판잣집은 철거되었으며 신림사거리로 가는 길도 깨끗하게 포장되었다.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2만 원짜리 봉천동 달동네 자취방은 블록벽돌로 지은 집이었다. 여름에는 더웠고 겨울에는 냉기가 그대로 들어왔다. 연탄으로 구들장을 데웠고 석유곤로로 밥을 해먹었다. 전기장판과 전기밥솥이 나왔지만 전기요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쓰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적인 경제생활은 내가 초등학생 시절 보았던 것과는 아주 크게 달라졌다. 차이는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10년 전보다 훨씬 잘살게 되었다. 이것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부터 10·26사건이 터진 1970년대 후반까지 내가 본 경제생활의 변화였다. (109쪽)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은 곧바로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 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시민들은 더 높은 수준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 면에서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188쪽)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대오 한가운데서 누군가 ‘십 원짜리’, ‘백 원짜리’ 욕을 섞어가며 학생회 지도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는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심상정. 아, 저 친구가 여러 학회의 여학생들을 모아 별도의 서클을 만든 다음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무림’의 남자들을 열 받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심상정이구나. “예쁜 입술에서도 험한 소리가 나오네요!” 그렇게 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 뒤 6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225쪽)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 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 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 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273~274쪽)
한국의 전후 베이비부머들은 한국기생충박멸협회는 몰라도 대변검사는 안다. 그들에게 대변검사는 즐겁지는 않지만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처음 채변봉투를 받은 것은 한국기생충박멸협회와 문교부가 학생들에 대한 집단 기생충 검사를 시작한 1969년,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조그만 흰색 종이봉투 안에 더 작은 비닐봉지가 들어 있었다. 나뭇가지로 대변을 찍어 비닐봉지에 담고 인적 사항을 기재한 종이봉투에 넣어 제출했다. 결과가 나오면 담임선생님과 양호선생님이 교실을 돌면서 기생충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른 약을 주었다. 반 친구들 태반이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약을 먹어야 했다. 나는 회충약을 받았는데, 한 주먹이나 될 만큼 양이 많아서 먹는 게 아주 고역이었다. (298쪽)

우리 세대는 반공백일장을 하고 반공포스터를 그리고 반공표어를 짓고 반공웅변대회와 반공궐기대회를 하면서 자랐다. 초등학생 때부터 간첩을 식별하는 방법을 배웠다. 새벽에 구겨진 양복을 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찾아온 친척, 심야에 북한 방송을 듣는 사람, 직업이 없는데도 고급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신고해야 한다고 배웠다. 혼자 여관에 투숙하면서 ‘아가씨를 부르지 않는 사람’을 의심하라는 ‘19금 식별법’도 있었다. 제일 널리 퍼진 반공 표어는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표어는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지 다시 보자”였다. 우리는 평범한 시민들이 이웃을 간첩으로 의심하도록 권하는 세상을 산 것이다. 학생들의 반공궐기대회 강제동원은 없어졌지만 반공포스터 그리기는 요즘도 여전한 모양이다. 최근 어느 초등학교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반공 포스터가 무척 깜찍했다. “포스터 그리기 지겹다 통일해라.” (363쪽)

서독은 동독을 흡수통일하려고 한 적이 없다. 동독 국민이 원하고 동독 정부가 결단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교류·협력하고 지원했을 뿐이다. 동독이라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려 하지 않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안정적으로 관리한 것이다. 서독은 그렇게 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으며 동독 정부의 무장을 해제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브란트 총리가 펼쳤던 새로운 동방정책의 한국적 버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같은 관점에서 평화공존과 높은 수준의 교류협력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대한민국 헌법이 명하는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에 이르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길을 찾으러 굳이 머나먼 드레스덴에 갈 필요는 없었다. (406쪽)

세월호의 비극은, 어쩌면 우리에게 올지도 모를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국민들이 이렇게 많이 슬퍼하고 미안해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나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보다 슬픔은 더 깊었고 분노는 더 뜨거웠으며 아픔은 더 컸다. 도대체 무엇이 지방선거 후보 경선 등 정당의 행사는 물론이요 지역축제와 동호인 행사까지 군말 없이 취소하게 만든 것일까? 나는 그것이 연민, 죄책감, 미안함 같은 감정과 희생자들의 고통에 대한 공명共鳴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과 유가족에 대한 연민,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사랑과 우정에 대한 공감,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탐욕과 부패의 구렁텅이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겪어야 했던 혹심한 고통에 대한 공명이다. 만약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오늘보다 더 훌륭한, 최소한 지금보다 덜 추한 대한민국에서 살게 된다면, 그런 대한민국을 만드는 힘은 바로 이 공감과 공명에서 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415쪽)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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