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만두의 중심부인 타멜의 밤은 늘 그렇듯이 환한 불빛과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얼굴들도 각양각색이었다. 국제적인 히피와 휴가를 이용해서 트레킹을 온 외국인들, 이 거리에서 뭔가 일을 해서 먹고사는 네팔인들이 그들이었다. 그 중에는 히말라야의 거봉에 도전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과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도 끼여 있었다. 어둠이 우산처럼 내려앉은 좁은 거리는 시커멓게 뿜어 대는 매연으로 두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폐차 시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낡은 자동차들이 요리조리 빠져 다니고, 그 사이로 사람들과 자전거와 릭샤가 곡예를 하듯이 비켜 갔다.
하훈이 타멜에 있는 '파노라마 포인트' 로지에 나타난 것은 저녁 7시경이었다. 이곳은 한국인 등산가 문형근이 운영하는 곳으로 네팔로 찾아드는 한국 산악인이나 여행객들의 집합소라 할 수 있었다. 하훈은 커다란 짐 꾸러미를 든 택시 운전사를 대동하고 로비로 들어섰다. 라운지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하훈이 아냐. 야,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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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제 서바이벌 키트는 혈액형이나 이름 생년월일 따위를 적어 집어 넣을 수 있는 작은 통으로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이 곧잘 몸에 지니곤 하는 것이다. 누군가 목걸이에 매달고 다니다가 여기 올라온 기념으로 묻고 간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옾은 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피켈 모서리로 얼음을 벗겨 내자 알루미늄 통 상단에 감긴 파란색 테이프가 보였다. 뚜껑 포면에는 H.H라는 이니셜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왕잠자리 눈같이 생긴 청색 고글 속에서 우태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건 하훈, 그 자식 꺼야!'
'뭐요? 훈이 형이오?'
'분명해. 이 파란색 테이프하고 이니셜이 증거야. 그 자식은 자신의 모든 장비에 파란색 테이프를 말아 놓는 놈이야. 자일까지도.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어.'
--- p.11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잡고 원무를 추듯이 껑충껑충 뛰었다. 지난 7일 간의 사투가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의 기쁨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진한 숭고함도 장엄함도 아니었다. 산소마저 희박한 고지에서 인간의 감정이란 현실감이 없었다. 식물들이 자라는 데도 고도의 한계가 있는 것처럼, 인간이 감정을 느끼는 데도 고도의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들은 단지 정상에 선 감동을 온몸으로 체험할 뿐이었따.
'베이스 캠프에 무전을 쳐야겠군.'
우태길이 무전기를 꺼내 발신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성호는 정상 파노라마 사진을 찍었다. 먼저 북쪽의 에베레스트를 배경으로 찍고, 다음에는 동쪽과 남쪽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서쪽으로 돌아서려 할 때였다. 뭔가 아이젠에 걸려서 다져진 눈 밖으로 튀어 나왔다. 은색 줄이었다.
--- p.10
내가 떠났다고 아직도 화를 내고 있고? 당신을 남겨두고 혼자 떠나 와서 정말 미안하오. 용서하오. 당신에게 상처를 줄까봐 늘 걱정스럽소. 당신을 떠올리면 이 조그만 텐트 안이 환해 지고 따뜻해진다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당신의 이름을 부룬다오. 잠이 드는 마지막 순간에도 당신의 이름을 되뇐다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항상 같이 있고. 처음부터,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하나였소. 지금도 당신은 나와 함께 로체 남편을 등반하는 중이오. 그 증거로 이 편지를 정상에 남겨두고 올 생각이오. 만약에 올라갈 수 있다면 말이오.
--- p.16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 뜰을 좋아했다. 그렇게 넓지는 않아도, 집 크기에 비하면 꽤 넓은 면적이었다.
엄마가 원예를 좋아하여, 먹을 수 있는 것도 몇 가지 길렀고, 정원석도 오밀조밀 놓여 있었고, 철따라 꽃이 피는 나무도 있었다. 그래서 그 뜰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좁다란 세계에는 내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가 몇 군데나 있었다. 나는 그곳을 소중히 여겼고, 어렸을 때는 옷을 더럽히는 줄도 모르고 땅에 앉기도 하고 누워 뒹굴기도 하였다. 마침내 어른이 되어서는 틈만 나면 마실 것을 들고 나가, 깔개를 깔고 앉아 있곤 했다. 엄마와 아버지와 히로시는 아무것도 하지않으면서 싫증도 나지 않느냐고 묻곤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싫증도 내지 않고 널따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발치의 이끼와 개미를 보고, 다시 자기 손에 비치는 햇살을 바라본다. 그러다 또 하늘을 보면 구름의 위치와 하늘 색이 변해 있는 것처럼, 조금씩 변해 가는 세계와 점점 흘러가는 시간이 무서웠다.
너무도 오래도록 똑같은 풍경이라서, 나는 그 자리에 있는 나 자신이 몇 살인지 모를 때도 있었다. 커다란 정원석에 기대 앉아, 역시 번갈아 하늘과 굵직한 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올려다보고, 그 다음에는 개미와 조그만 돌과 흙을 본다. 그러면 자신의 크기마저 알 수 없어져, 기뻤다. 가끔 엄마가 시장을 보러 나가는 길에, 아버지가 유독 일찍 돌아오는 날에, 뜰에 있는 나를 발견한다. 부모님은, 갠 날이면 방안에 있기 싫어하는 나를, 영상으로 알고 있다. 갠 날이면, 나는 이미 뜰의 일부다. 두 사람은 당연한 일인 듯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고 들어온다.
히로시가 다가오는 일도 있다. 히로시는 문으로 오지 않는다. 대나무 울타리를 넘어 온다. 히로시는 눈이 나빠서, 늘 눈을 가늘게 찡그리고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나를 확인한다. 나는 웃는다. 히로시도 웃는다. 그 웃는 얼굴에는 우리 둘이 만난 이후의, 어린 시절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의 모든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 같은 일을 하다 보면, 거기서 묘한 깊이가 생겨난다. 두 사람의 웃는 얼굴은 그야말로 그런 것이었다. 순간, 지금 와서 새롭고 멋진 일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될 만큼 깊은 교류가 가로지른다.
그런 때, 나는 정말 벽도 천장도 없는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시간의 흐름을 포함한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고, 단둘이 눈을 마주하고 있다. 음악 소리가 들릴 듯한, 달콤한 풀내음이 풍겨올 듯한 기분이 든다. 감각만이, 혼(魂)만이 생기발랄하게, 이 벽 없는 세계에서, 넓디넓게 퍼져 있는 하늘 아래서, 마주한다. 나이도 성별도 없고, 고독한 느낌은 들지만 드넓다.
어디에 있든 왠지 문득 불안해질 때면, 나는 어느 틈엔가 마음속으로 뜰에 있을 때의 자신으로 돌아가곤 한다. 뜰은 나의 감각이 출발한 지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준 공간이다.
pp.9-11
가장 큰 두려움은 두려움 그 자체죠. 실패하면 어쩌나, 이 외로움을 어찌 다 감당하나, 이러다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일까, 그러나 그런건 다 핑계일 뿐이에요. 사람들은 미래를 다 걱정해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모두들 겁을 먹고 있죠. 기술문명이 너무 빨리 변하니까 그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어요. 그렇치만 휩쓸리면 안되죠. 너무 길게 내다볼 필요도 없어요. 멀리서 보면 길이 안보이죠. 인생 자체가 오르고 떨어지는 급전직하에요. 한 발 한 발 움직이면서 그 순간에 나를 맡길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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