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신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걸 고백했을 때 부모는 자기들을 원망하라고 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어떤 부모들은 그들에게 입은 상처를 말했을 때조차도 아직도 그런 일을 기억하냐며, 네가 부족한 게 뭐가 있냐며, 내가 너한테 못 해 준 게 뭐가 있냐며 자녀들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고 하는데 나는 복에 겨웠다. 그런데 사과를 받아도, 부모의 태도가 바뀌어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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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상처로 남아 있던 이 일기장을 다시 꺼내서 보고 싶었던 건 심리 상담을 받고 나서부터였다. 일기장을 보면 어린 시절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사실을 직시하게 되면 내 우울의 시작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기장을 처음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그때는 부모와 연락하지 않아 부모의 집 현관문 비밀번호도 몰랐을뿐더러 내가 가는 시간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부모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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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부부 싸움과 별개로 엄마에게 맞을 때면 “잘못했어요”라고 울면서 두 손을 싹싹 빌었는데 엄마는 빌지 말라며 더 때렸다. 어떻게 해야 매를 덜 맞을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발목을 잡혀 질질 끌려다니면서 맞았는데 나중엔 엄마가 어디서 종아리를 때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왔는지 종아리를 맞았다. 하지만 뺨은 제외되지 않았나 보다. 엄마는 기분에 따라 우리를 대하는 모습이 달랐다. 기분이 좋을 때는 충분히 사랑해 줬고, 우리가 뭘 잘못하면 크게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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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와 감정을 공유했다. 엄마는 집안 경제 사정, 아빠의 무능력함, 남동생에 대한 걱정 그리고 엄마 인생의 한탄까지 모든 것을 나에게 이야기했다. 처음엔 나도 엄마밖에 몰랐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고, 엄마가 울면 나도 울었고, 엄마가 아빠를 욕하면 나도 아빠를 원망했다. 엄마가 화를 내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고, 엄마가 기쁘면 나도 기뻤다. 엄마의 감정은 곧 나의 감정이었고, 엄마의 생각은 곧 나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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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어릴 적 아빠의 폭력이 큰 트라우마가 되어 모든 남성에 대해, 특히 중년 남성의 폭력에 큰 트라우마가 있다. 그런데 이제 아빠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나와 엄마의 갈등으로 보고 싶은 딸을 못 보는 피해자. 그리고 못난 아비 타령을 해대는데 구체적으로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그저 못 배워서, 가진 게 없어 많이 해 주지 못해서 못난 아비라 칭한다. 본인의 가정 폭력에 대해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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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상담 선생님께도 내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 선생님, 심리 상담 선생님 두 전문가에게서 같은 말을 두 번 들으니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위 자식에게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라고들 한다. 나 역시도 엄마가 내 세상의 전부였다. 내 외사랑을 인정한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어 몸부림치던 나를 인정한다. 뿌옇게 안개로 덮여 형체를 모르겠던 것이 점점 형태를 잡아가고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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