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13년, 한나절 신나는 사이클링처럼
모처럼 온 식구가 자전거를 몰고 집을 나섭니다. 아내와 막내는 물론이고 멀리서 공부하다 며칠 전에 돌아온 큰아이도 합류했습니다. 둘째까지 있었더라면 그야말로 ‘가족 총집합’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녀석은 앞으로 두어 주나 더 있어야 얼굴을 보여줄 모양입니다. 사실 첫째도 곧 뉴질랜드로 돌아가야 합니다. 힘들게 잡은 약국 아르바이트를 놓칠 수 없는 까닭입니다(약학대학 졸업반 학생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사방에 흩어져 사는 가족이 다같이 뭉친다는 건 이처럼 만만한 노릇이 아닙니다.
일단 가능한 가족끼리라도 나들이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2박 3일 정도 시간을 내서 둘리켈과 나갈콧으로 사이클링을 다녀올 작정입니다. 코스는 왕복 150킬로미터 남짓. 그만하면 막내한테도 부담스럽지 않을 겁니다. 공식적인 기획 의도는 ‘장남 무사 귀환 환영회’를 열자는 것이지만, 사실 나머지 식구들에게도 한숨 돌릴 틈이 필요했습니다. 연말부터 봄까지 그야말로 넋이 쏙 빠지도록 바빴거든요. 병원일도 많았거니와 뜻밖의 손님들이 여럿 찾아오고 모임이 꼬리를 무는 바람에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편히 쉴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인들이 눈코 뜰 새 없는 판국에 자전거가 무슨 재주로 바깥바람을 쐬겠습니까? 세 대가 나란히 건넌방에 누워 바퀴를 하늘로 쳐든 채 먼지를 뒤집어 쓸 밖예요.
모두들 상기된 표정이지만 아무래도 막내 인모가 가장 신이 났습니다. 진즉부터 준비를 마치고 좁다란 마당을 빙빙 돌며 출발을 재촉합니다. 형은 아우가, 아내는 그런 장남이 마냥 대견합니다. 이렇게 멋진 행사에 성대한 기념식이 빠질 수 없습니다. 둥글게 둘러서서 함께 기도를 드린 뒤에 힘차게 외칩니다. “파이팅!”
골목에서 큰 길로, 대로에서 시골길로
마침내 자전거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선두는 내가, 후미는 첫째가 맡습니다.
집에서부터 한동안은 골목이 이어집니다. 네팔의 뒷길은 들쭉날쭉 좁아졌다 넓어졌다 불규칙합니다. 그 좁은 길을 사람들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소와 개가 사이좋게 나눠 씁니다. 사고를 당하지 않으려면 앞을 잘 살피는 동시에 흘낏흘낏 옆 골목을 곁눈질해주는 센스가 필요합니다. 힘들겠다고요?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젠 네팔사람이 다 됐거든요. 이쯤이야 장애물 축에도 못 낍니다. 아이들은 오히려 스릴을 즐기는 눈치입니다. 자전거 네 대가 요리조리 길을 누비고 지나갑니다.
20분 정도 지나면 갑자기 앞이 툭 터지면서 큰 길이 나타납니다. 간선도로 중에서도 교통량이 많기로 손꼽히는 대로입니다. 여기부터는 조금 긴장을 하는 게 좋습니다. 네팔의 도로에서는 자동차를 무서워하지 않는 통행인들과 상대방이 양보해줄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 운전자들의 진검승부가 하루종일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곳곳에서 사고가 터질 것 같습니까? 뒤죽박죽 어지럽겠다고요?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혼란이 장기간에 걸쳐 숙성되면서 새로운 질서가 발효됐습니다. 기사와 통행인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면서 양보와 단호한 거부의사를 판별해냅니다. 자동차가 살짝 속도를 떨어뜨리면 그 사이로 폴짝폴짝 몇 걸음씩 길을 건너갑니다. 우리 네 식구도 능숙하게 그 질서에 편입합니다.
흐름을 타자마자 곧바로 다른 문제에 부닥칩니다. 오르막에 접어들면서 매연의 공격이 시작되는 탓입니다. 사실 카트만두의 탁한 공기는 악명이 높습니다. 거리를 걸으면 금방 목이 칼칼해지고 와이셔츠 깃은 순식간에 꼬질꼬질해집니다. 하긴, 수십 년씩 혹사한 노후 엔진에게 질 낮은 연료를 잔뜩 먹였으니 깨끗한 ‘방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릅니다. 차에 탄 승객들이야 창문을 닫으면 그만이지만 자전거에 올라탄 이들에게는 고행이 따로 없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언덕을 오르려면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아야 하고 그렇게 힘을 쓰자니 입은 더 크게 벌어집니다.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최상의 조건에서 매연의 진수를 맛보게 됩니다. 숨이 턱턱 막히지만 그래도 이쯤은 애교로 받아줄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목이 적응을 했는지 힘들긴 해도 죽겠다고 엄살을 피울 정도는 아닙니다.
고생스러운 시간이 있으면 신나는 순간도 있는 법. 고갯마루를 넘으면서 자전거의 호시절이 시작됩니다. 일사천리로 달려 내려가는 기분이 그만입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요란합니다. 수레에 귤 몇 개를 올려놓고 무료하게 손님을 기다리는 행상, 사리 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리는 여인네들, 우연히 만난 친구와 손짓을 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남정네들의 얼굴이 휙휙 지나갑니다. 적당한 피로감과 공복감이 도리어 뿌듯한 느낌을 줍니다. 차르르륵 체인이 기아를 끼고 돌아가는 소리가 마냥 상쾌합니다. 머잖아 시골길에 들어설 테니 매연과도 곧 작별입니다.
논을 끼고 달리는 길은 좁고 비포장이지만 그만큼 한산해서 마음이 한결 느긋해집니다. 너른 들판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릅니다. 나이든 농부 둘이 논두렁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습니다. 소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습니다. 언덕과 언덕이 겹쳐진 풍경 뒤로 거대한 설산들이 보입니다. 실처럼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개울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비탈, 경사지를 지나면 마을이 나타납니다. 너무나 규칙적이어서 마치 도돌이표가 붙은 악보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시골 동네를 지날 때마다 아이들은 흔치 않은 외국인들을 구경하고 일행은 꼬마들의 천진한 몸짓을 살피는 진풍경이 반복됩니다.
허름한 가게에 들러 차 한 주전자를 주문합니다. 나이 든 주인장이 마디 굵은 손으로 차를 끓여냅니다. 맛은 조금 떨어지지만 인심만큼은 후해서 잔이 넘치도록 부어줍니다. 초년병 시절에는 그 맛이 그 맛이더니 이제는 입에 착 달라붙는 찻물을 가릴 줄 알게 됐습니다. 한편으로 길을 묻고 다른 한쪽으로 자전거 상태를 점검합니다. 험한 길을 달릴수록 기계 상태에 민감해야 합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고장이라도 나면 큰 탈이니까요. 특별한 문제는 없는데 공기펌프가 없어졌습니다. 자전거 프레임에 매달아뒀는데 어디선가 떨어져버린 모양입니다.
어련하겠습니까? 길이 좀 험했어야 말이지요. 그렇게 사납게 흔들어대는데 뭔들 안 떨어지겠습니까. 큰맘 먹고 사서 개시도 안 한 물건이라 아깝기는 하지만 되짚어 돌아갈 수도 없고, 간다 한들 남아 있을 리도 없어서 깨끗이 잊기로 합니다.
사이클링, 네팔 13년을 압축하는 삽화
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옛 도시 박다풀을 지나면 본격적인 난코스, 오르막 40리 길에 접어듭니다. 그리고 그 길 끄트머리가 이번 여행의 목적지 나갈콧입니다. 평지와 650미터의 고도 차이가 나니까 자전거를 타고 수락산이나 대둔산 정상까지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대충 비슷합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경사로를 타기 시작하지만 생각만큼 속도를 내지 못합니다. 종일 자전거를 탄 탓에 제법 기운이 빠진데다가 언덕길이기 때문일 겁니다. 가야 할 곳이 빤히 보이는데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길은 큰 뱀처럼 산허리를 휘감으며 빙빙 돌아 올라갑니다. 10분 전에 지나온 길이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입니다. 왼쪽으로는 거칠고 황량한 언덕길이, 오른쪽으로는 까마득한 산비탈이 펼쳐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세가 풀어집니다. 입에서는 거친 숨이 연신 쏟아져 나옵니다. 뒤에서 보면 엉덩이가 씰룩씰룩 좌우로 심하게 움직이는 게 어릿광대의 우스갯짓 같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진모 녀석이 제 엄마 곁에 바짝 붙어 한 마디 내던지고 냅다 도망칩니다. “엄마, 히프가 너무 큰 거 아녜요?”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막내의 지청구가 뒤따라옵니다. “아빠, 힘들어요.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이러니저러니 말이 오가는 것도 잠시뿐, 차츰 말수가 줄어들고 저마다 자기 상념에 빠져듭니다. 몸으로는 묵묵히 페달을 밟는 한편, 머리로는 저마다의 실마리를 붙들고 생각의 끝을 더듬어갑니다. 아내는 다음 주 요리교실에서 가르칠 음식을 고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모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떠나지 않는 걸 보면, 뉴질랜드에 두고 온 여자친구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요즘 힙합댄스에 푹 빠진 인모는 머릿속으로 고난도의 동작을 흉내내고 있을 겁니다.
나이가 드는 걸까요? 개인적으로는 요즘 들어 지난 세월을 복기해보는 일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의과대학에 들어가고, 아내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병원에서 일하면서 크리스천 의료인들과 교제하고, 선교사로 지원하고, 뉴질랜드에서 훈련을 받고, 오지 병원에 부임했다가 카트만두로 나와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마음속으로 하나하나 따라갑니다. 네팔에 들어와 적잖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무던히도 많은 언덕과 비탈길을 오르내렸습니다. 문득 선교사로, 외과의사로 이곳에서 지냈던 13년이 자전거 타기와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욕이 앞서서 무작정 달려 나갔다가는 지쳐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앞만 보고 내달리면 속도는 다소 빠를지언정 주변을 일일이 살피기 어렵습니다. 목표에만 정신을 빼앗기면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고생하러 자전거를 끌고 나선 게 아닌 것처럼 고행하러 선교지에 나온 것도 아닙니다. 지도를 잘못 읽으면 갔던 길을 한참이나 되돌아와야 합니다. 고단한 오르막 뒤에는 신나게 달릴 수 있는 비탈길이 기다립니다. 위험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공기 펌프를 잃어버리고, 체인이 끊어지고, 논두렁에 처박히기도 했지만 언제나 돕는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자전거 수리점이 있었고, 지나던 차가 실어다주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뜻밖의 복병을 만나 사역을 접어야하는 게 아닐까 고민할 때면 어김없이 구원의 메시지가 도착하곤 했습니다. 성경말씀이나 상담 전문가의 조언, 동료 선교사, 네팔 교회 크리스천, 아름다운 자연 등 통로는 다양했지만 주제는 언제나 사랑과 평안, 위로였습니다.
진한 사랑 얘기를 들어보시렵니까?
어느덧 정상이 코앞입니다. 길고 긴 장정이 끝났습니다. 아이 엄마가 일등, 나머지 식구들이 공동 이등입니다. 선두와의 격차는 20분 남짓. 이만하면 우수한 성적으로 하이킹을 마친 셈입니다.
해발 2,190미터 높이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맛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합니다. 고된 행군의 대가로 얻은 기쁨이어서 더 그런지도 모릅니다. 멀리 보이는 카트만두는 여전히 탁한 공기에 잠겨 있습니다. 반대쪽으로는 척박한 산비탈을 깎아 세운 계단식 논밭들이 차곡차곡 겹쳐지며 흘러갑니다. 오늘 달려온 구불구불한 길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제법 긴 여정을 잘도 달려왔습니다.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내려다보는 기쁨을 어떻게 올려다보는 환희에 비하겠습니까? 고개를 들면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히말라야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다들 하얀 눈 모자를 뒤집어쓰고 점잖게 늘어 서 있습니다. 동구 밖까지 마중 나온 동네 어른들 같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는 붉은 노을빛까지 겹쳐져서 그야말로 장관을 이룹니다.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아내도, 진모도, 꼬마 인모도 말이 없습니다. 수많은 얼굴과 사건들이 떠올랐다 가라앉습니다. 어떤 이들, 무슨 일들이었냐고요? 자세히 말해보라고요?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바람결에 맛있는 음식 냄새가 섞여 있는 걸 보니 저녁 준비가 다 된 모양입니다. 잠깐 다녀와서 진한 이야기들을 들려드리겠습니다.
- 여는 글
“나이가 드는 걸까요? 개인적으로는 요즘 들어 지난 세월을 복기해보는 일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의과대학에 들어가고, 아내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병원에서 일하면서 크리스천 의료인들과 교제하고, 선교사로 지원하고, 뉴질랜드에서 훈련을 받고, 오지 병원에 부임했다가 카트만두로 나와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마음속으로 하나하나 따라갑니다. 네팔에 들어와 적잖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무던히도 많은 언덕과 비탈길을 오르내렸습니다. 문득 선교사로, 외과의사로 이곳에서 지냈던 13년이 자전거 타기와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욕이 앞서서 무작정 달려 나갔다가는 지쳐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앞만 보고 내달리면 속도는 다소 빠를지언정 주변을 일일이 살피기 어렵습니다. 목표에만 정신을 빼앗기면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고생하러 자전거를 끌고 나선 게 아닌 것처럼 고행하러 선교지에 나온 것도 아닙니다. 지도를 잘못 읽으면 갔던 길을 한참이나 되돌아와야 합니다. 고단한 오르막 뒤에는 신나게 달릴 수 있는 비탈길이 기다립니다. 위험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공기 펌프를 잃어버리고, 체인이 끊어지고, 논두렁에 처박히기도 했지만 언제나 돕는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자전거 수리점이 있었고, 지나던 차가 실어다주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뜻밖의 복병을 만나 사역을 접어야하는 게 아닐까 고민할 때면 어김없이 구원의 메시지가 도착하곤 했습니다. 성경말씀이나 상담 전문가의 조언, 동료 선교사, 네팔 교회 크리스천, 아름다운 자연 등 통로는 다양했지만 주제는 언제나 사랑과 평안, 위로였습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