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으면 그 사람의 자아도 사라지는 걸까?
“과학과 인간 사이에서 흔들린다. ‘인간’임을 받아들이고 고찰한다. 유례가 드문 책.”
_모기 겐이치로(일본의 뇌과학자, 『아침의 재발견』, 『생각하는 인간은 기억하지 않는다』 등의 저자)
청소도 요리도 그토록 완벽했던 엄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웅크리고 있다. 엄마가 멈추자 집도 멈췄다. 엄마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설마 엄마가….’라는 믿고 싶지 않은 생각을 억누른 채 열 달이 지나서야 병원 문을 두드렸다. 엄마는 알츠하이머성 치매(알츠하이머병)를 진단받았다. 겨우 예순 다섯이었다. 십수 년간 뇌를 연구해온 저자는 치매는 누구나 걸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족과는 연결시키지 못했다. 뇌과학자이면서도 엄마가 치매에 걸리는 걸 막을 수 없었고 치료할 수 없다는 상황을 처음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때 세상이 끝나는 듯한 충격을 받고 무력감에 빠졌다.
‘나를 잊는 날이 오면, 엄마가 잘했던 것을 전혀 할 수 없게 되면, 엄마가 아니게 되는 걸까?’
‘기억력 등 인지능력이 저하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무엇이 소중한가 하는 엄마의 인격, 감정까지 바뀌어버릴까?’
‘건강한 모습까지만 엄마일까, ‘엄마다움’이란 무엇일까?’
이제 엄마는 엄마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비참하기만 했던 저자는 2년 반에 걸쳐 매일의 사건, 기분, 감정 전부를 토해내듯 빼곡하게 기록해나갔다. 그것은 엄마가 지금까지 당연히 해왔던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현실에 맞닥뜨리는 순간순간이면서도 ‘엄마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저자를 가장 큰 두려움에 몰아넣었던 의문 ‘기억을 잃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닌 걸까?’는 일기를 쓰면서 딸이자 뇌과학자로서 치매로 인한 그 사람다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엄마 곁에서 찾겠다는 단단한 다짐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이 책이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관한 뇌과학적 처방전
현대 의학으로 아직까지 치료제가 없는 병.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병. 그런 병에 걸린 엄마를 위해 저자는 더더욱 엄마에게 도움이 될 일을 직접 찾아나서기로 결심하면서 엄마가 할 수 없게 된 여러 가지 것들보다 ‘엄마에게 남아 있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뇌과학 관점에서 치매에 관하여 저자가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신의 발견과 고찰이 치매 환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첫째, 기억 메워주기
알츠하이머병으로 가장 먼저 손상되는 뇌 부위는 해마이다. 해마는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을 대뇌피질에 저장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할 때(인코딩)도, 대뇌피질에서 기억을 꺼낼 때(리트리브)도 사용되는 기억의 중추다. 즉, 해마의 손상으로 발생하는 알츠하이머성 기억장애는 아주 간단한 것조차도 새로운 것을 기억하기 힘들고 대뇌피질에 보존된 과거 기억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고 알츠하이머병에 걸린다고 해서 한꺼번에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기억에는 단기기억(전두엽에서 담당), 서술기억, 절차기억(대뇌기저핵과 소뇌가 담당) 등이 있는데, 저자는 특히 해마의 작용이 반드시 필요한 서술기억(에피소드기억)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저자의 엄마가 된장국을 만들기 위해 무 썰기를 시작한다. 우선 오랜 세월 몸으로 반복하여 익힌 칼질은 절차기억이고, 몇 초 동안만 기억을 유지하면 되는 무 썰기는 단기기억으로 해마의 작용과 무관하기 때문에 결국 ‘무 썰기’는 엄마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된장국을 만들려고 했다’는 몇 초 이상 기억해야만 하는 에피소드기억으로 해마가 심하게 위축된 엄마는 최종목표를 잊어버리고 요리를 멈춘다. 그렇게 엄마는 주방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
저자는 자신이 엄마의 에피소드기억을 보완해드리면 엄마가 좋아하고 잘했던 요리를 계속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엄마와 함께 주방에 들어가서 엄마가 채소 썰기를 하다가 멈칫하면 ‘된장국에 넣을 거야.’라고 반복해서 알려드렸다. 이런 식으로 엄마는 딸과 함께 된장국을 완성했다. 엄마는 자신감과 함께 주방을 되찾았다.
둘째. 산책하기
저자의 엄마는 해마의 위축과 함께 후두정피질의 활동이 약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전형적인 뇌 이상이었다. 원래 해마와 후두정피질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는 회로를 구성한다. 따라서 해마에 문제가 생기면 후두정피질의 활동저하가 뒤따르고,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에도 문제가 생긴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란 쉬거나 멍하니 있을 때 활성화되는 신경회로로 기억을 정리정돈한다. 기억을 정리정돈한다는 것은 집중할 때 새롭게 들어온 정보를 뇌가 쉬는 동안 분류하고 기존의 정보와 연결시켜 유의미하게 경험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엄마는 현실의 자극이 마구잡이로 뇌에 들어올 뿐 기억을 정리정돈할 수 없어 실제로 의미 있는 것을 파악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되면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가도 헛돌기만 하게 되며, 헛돌기가 이어지면 자신감을 잃고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 자체를 포기하게 될 수 있다. 그렇게 엄마는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만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자는 영국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였던 프랜시스 골턴의 정신작용 실험 연구논문에서 힌트를 얻어 ‘산책하기’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머릿속을 비우고 집에서 나와 걷는다. 꽃, 나무, 엄마, 아이, 자전거 등등 바깥세상에서 시시각각 날아드는 새로운 자극에 몸을 맡기면 긴장이 풀어지고 무의식이 적당한 자극을 받아 자신의 삶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추억이 되살아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산책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릴렉스할 수 있고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 기억의 정리정돈이 가능해진다.
걷기는 운동요법이 될 수도 있다.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운동하면 현재 알츠하이머병의 원인물질 중 한 가지로 추정되는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분해되어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에 고인 아밀로이드 베타덩이(노인성반점)가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났다. 즉, 산책을 통한 운동은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을 완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산책할 때 항상 똑같은 길로만 다니는 것보다 가능하다면 때로는 자연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숲길을 가보거나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추억이 서린 장소를 가보기를 저자는 권한다.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기 위함인데, 인간은 평소와 다른 색다른 환경에 놓이면 감정이 가장 먼저 활발하게 활동한다.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느낀 후, 대뇌피질이 대처법과 함께 자신이 경험한 것을 설명하고자 필사적으로 활동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심리적 안전감을 확보해야, 즉 환자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과 함께해야 자신의 에너지를 내적 안정을 찾는 데 쓰지 않고 새로운 바깥세상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해마에서부터 대뇌피질까지 세포사(cell death)가 진행되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 대뇌피질을 발달시킬 수 있는 풍부한 감정을 갖게 하는 방법은 저자가 발견한 희망이다.
이러한 뇌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저자는 부모님께 산책을 권유했고, 부모님은 곧바로 거의 매일 산책을 나가셨다.
2년 반 동안 아버지와의 산책 그리고 저자와의 요리는 궁극적으로 엄마의 병을 낫게 하진 못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되찾게 했다. 실제로 저자의 엄마는 소파에만 앉아 있던 상태에서 조금씩 벗어나 ‘할 수 있는 일’이 늘었다. 저자가 감기에 걸렸을 때 홀로 죽을 끓여 간호해주시는 등 딸을 챙기는 엄마로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치매 환자가 이런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미리 단정하지 말고 그에게 남은 건 무엇인지 세심히 살펴 그걸 계속할 수 있게 도우면 심리적인 안정감과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주변에 흥미를 갖게 되어 그 사람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감정의 힘
인류의 뇌는 진화론적으로 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 본능과 생명 유지 기능을 담당하는 뇌간에서 시작되어 감정을 담당하는 대뇌변연계가 축적되고 마지막 진화단계인 고차원적 인지기능과 이성을 담당하는 대뇌피질로 둘러싸여 완성되었다. 생명체로서 원시적인 부위일수록 뇌 위축에 반항하며 마지막까지 남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이 필사적으로 문제에 대처한다고 해도 이성을 잃고 감정과 본능뿐이라면 인간다움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감정과 기억에 관한 뇌과학, 심리학 등 다양한 연구결과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종합한 끝에, 이성이 만드는 그 사람다움 외에 감정이 만드는 ‘그 사람다움’이 있음을, 그러므로 기억을 잃어도 그 사람은 그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결론의 핵심 키워드는 ‘감정’이다. 감정은 이성보다 앞선 지성이며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이다. 감정은 타고난 개성이며 인지능력과 마찬가지로 경험에 의해 발달해온 개인적인 능력이고 지금도 발전 중인 능력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분명 새로운 것을 기억하기는 힘들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은 할 수 있으며, 건강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감정은 한동안 지속된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는 감정이 남아 있다. 그들에게 정보를 올바르게 전해주면 이전과 같은 감정적 반응을 한다. 그럴 때 저자는 엄마가 이곳에 있음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음을, 치매에 걸렸어도 엄마는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치매에 걸렸어도 결국 감정이 건재한 이상 그 사람다움을 유지할 수 있고 여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