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에 표시된 항로는 동해를 지나고 있었다.
위스키는 독했고, 한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던 내 몸은 감당치 못했다. 잠에 빠졌다. 그사이 비행기는 태평양을 건넜다.
도착까지 52분.
10년을 살았던 땅이다. 그 두 배의 세월 동안 떠나 있었다.
20년 만에 돌아간다고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회귀의 숙명을 따르는 연어 신세쯤으로 여겨야 할까. 간단하게 생각하자. 밥벌이의 수단일 따름이다. 감상을 앞세워 밥벌이를 차단한다면, 나는 바보 멍텅구리다.
--- p.23
돌아왔다.
결국 돌아오고 말았다는 사실이 저릿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20년 만이었고, 그 세월의 부피를 비로소 실감했다.
아홉 살 꼬마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잡아주리라 기대하며 울며 사정했고 몸부림을 쳤다. 결국 무력한 저항이었다.
스물아홉 살 사내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감정의 절제를 넘어 아예 차단하고 봉쇄하길 원했다. 감정에 휘둘려봤자 무모한 자학이라는 걸 익히 경험했다.
20년의 시간이 어쨌든 흘러갔다.
--- p.36
불쑥 조명 장비를 매단, 까마득한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현기증이 밀려왔다.
아빠가 죽었다.
나는 어쩌자고 거기까지만 생각했을까.
죽어 땅에 묻혔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또 산소의 행방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사실 속에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 앞에서 나는 눈먼 자가 되어 허둥대고 있었다.
--- p.97
견딜 만한 힘?
인내를 두고 한 말이라면, 틀렸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그림이 아니라 인내였다. 나에게 인내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 같은 거였다.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었다.
인내만 놓고 따진다면, 나는 100살 노인보다 더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
백혈병으로 뼈와 살이 너덜너덜해지는 고통을 견뎠다. 아빠에게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참아야 했다. 이방의 땅에서 외톨박이로 지내도 묵묵히 버텼다.
--- p.139
어느 날 한 사람을 그리워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렇다고 끝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리움이 있던 자리에 새로이 미움이 들어선다. 미워하고 미워하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 때, 한 사람의 존재가 덧없어진다. 문득 떠올려도 감정의 동요는 없다. 비로소 한 사람에게서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그런 줄 알았다.
틀렸다. 내 스스로 거북이처럼 연약한 부분들을 단단한 껍질 속에 감추고 있었다. 아빠로부터 달아나려 안간힘을 썼을 뿐이다.
이제 와서 다시 미워하고, 미워하다 예전처럼 그리워하란 말인가.
미움은 괴롭고, 그리움은 서글프다.
자신 없다. 피하고 싶다. 아빠의 존재 없이 홀로 이룩한 삶의 균형이 속절없이 무너질까, 나는 두렵다.
애석하게도 이미 늦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아예 이 땅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모를까.
--- p.177
박 화백이 고개를 돌려 어스름이 내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움이한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솔직히, 정 선생이 부러웠다. 정 선생한테는 다움이가 있었으니까.”
창턱에 앉은 비둘기 두 마리가 하루의 안부를 묻듯 부리를 비벼대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정 선생은 굉장히 살고 싶었겠지. 하지만 스스로 잃게 될 것은 돌보지 않더구나. 오로지 자신의 죽음 때문에 장차 다움이가 잃게 될 것을 아파했다.”
수만 볼트의 전압에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이 떨려왔다.
나는 아빠의 죽음만을 팩트로 받아들였다. 다른 것들은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여겼다. 아빠가 살고 싶었으리라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채로.
--- p.228
과연 사락골의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이름처럼 정다운 아이? 3학년이면서 5학년 수학 문제도 척척 풀어대는 아이? 배우지 않고도 원하는 모습을 조각해낼 수 있는 아이?
그리고, 아빠라면 죽고 못 사는 아이가 바로 정다움이었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소년 에뒤아르는 아빠를 그리워하다 미워하게 되었다.
청년 케인은 미워하다 끝내 아빠의 존재마저 몰아냈다.
아빠는 세월이 흘러 자연히 잊혀진 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 강제 삭제되었다. 그리고 아빠와 함께 내 감정도 종료되었다.
인생도 리셋이 될까. 복구 프로그램으로 삭제된 파일을 회복시키듯 아빠의 존재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을까.
---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