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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란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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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3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196쪽 | 292g | 140*205*11mm
ISBN13 9788954448086
ISBN10 8954448089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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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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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게이의 본명은 강태승. 강태승도 나처럼 외톨이였다. 우리 반에 여자 외톨이는 내가 맡고 있었고 남자 외톨이는 강태승이 맡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같은 처지이면서 한 번도 말을 나누거나 눈빛조차 마주친 적이 없었다. 강태승이 나하고 다른 점은 그는 폭력과 괴롭힘도 당한다는 거였다. 괴롭힘을 당하는 이유는 단 하나, 강태승은 화장을 하고 다녔다.
--- p.16

신비는 밥을 다 먹고 내가 옆에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와 수다를 떨며 식당에서 나갔다. 그날 나는 내가 살던 세상에서 신비가 사는 세상으로 건너뛰었다. 내가 살던 세상이 어둠과 그늘과 온갖 우중충한 것으로 덮여 있었다면 신비가 사는 세상은 밝음과 환희와 온갖 상쾌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 p.60

아빠는 들떴고 새엄마는 화사했다. 아빠는 접시에 음식을 가득 담아 먹고 또 먹었다.“우리 춘란이 많이 먹어. 여기 있는 거 다 먹어도 돼.”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아빠는 틈틈이 나를 챙겼다.
여름방학 때 새엄마가 싸 준 도시락 덕분에 나는 새엄마와 한층 가까워졌다.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동화에 나오는 나쁜 계모도 아니고 유담이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콩쥐팥쥐 같은 갈등 요소도 없었다. 오히려 좋은 점이 많았다.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아빠와 분담해서 하던 집안일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물론 아빠는 새엄마와 집안일을 함께 했지만 나는 집안일에서 제외되었다.
불편한 점도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원하지 않는 자리에 함께 있어야 했다. 이번에도 신비와의 약속을 미루고 생일파티에 참석해야 했다. 가족 사이에는 공유되는 분위기라는 게 있다. ‘나’는 최대한 배제되고 ‘우리’가 유별나게 강조되는 게 가족공동체라는 것을 아빠의 결혼을 통해 알게 됐다.
--- p.86

가족은 행복한 금요일을 보내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안에서 아빠와 새엄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담이가 재롱을 떨고 있었고 그 앞에 아빠와 새엄마가 웃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유담이가 나를 보자 뛰어왔다.
“언니.”
유담이를 손으로 밀쳤다. 나는 유담이에게 나를 언니라고 부르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공유하도록 강요당하는 이런 가족도 결코 허락한 적이 없다. 새엄마도, 유담이도, 새엄마 배 속에 들어 있는 내 두 번째 동생도, 심지어는 아빠마저도 내가 원한 관계는 아니었다. 모든 관계가 내가 원한 게 아니다. 학교도, 이 지구도, 저 우주도.
--- p.116

부드러운 햇살이 집 안 풍경을 더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오히려 낯설었다. 이곳은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곳인데. 아빠와 새엄마와 유담이의 스위트홈인데. 내가 유령이 돼서 화목하고 단란한 어느 가정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식탁위에 상보가 덮여 있었다. 상보를 젖히니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밥그릇과 국그릇, 달걀말이와 멸치볶음, 깍두기 반찬이 작은 접시에 담겨 놓여 있었다. 국그릇 옆에는 메모지도 있었다.
― 일어나면 밥 챙겨 먹어. 냉장고에 사과 있으니까 밥 먹고 꼭 먹고. 밥심만 있으면 어떤 힘든 일도 버틸 수 있으니까 든든히 먹어. 담임선생님한테는 내가 연락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가 좋아졌으면 좋겠다.
‘새엄마가’라고 쓴 글씨를 지운 뒤에 ‘엄마가’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새엄마 글씨였다. 네모반듯하고 딴딴해 보이는 글씨체였다.
--- p.140~141

“사랑도 결국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거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희생이니 뭐니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결국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지.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중심은 바로 나 자신이야. 그래서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도 하고. 용서는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거잖아. 아무리 주위에서 용서하라고 강요해도 내 마음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해? 난 영원히 서지우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카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온다는 건 그동안 속에서 곪고 곪은 게 터진 거라며 태승이가 말했다. 그러니 뭐가 됐든 이제 끝이라고. 나에게 그 말이 무엇보다 위로가 됐다. 곪아서 터졌다는 건 곧 회복될 일만 남았다는 증거니까.
창밖으로 굵은 먼지 같은 것들이 휘날렸다. 먼지 덩어리는 허공에서 어지럽게 빙그르 돌기도 하고 춤추듯 너울거리기도 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 먼지 덩어리가 점점 더 많아졌다.
“어, 눈이네!”
창밖을 무심코 보던 태승이가 감탄사처럼 내뱉었다. 나는 창가 쪽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봤다. 눈발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11월에 내리는 첫눈이었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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