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은 대부분 학술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고갱, 르누아르, 모네, 피사로, 샤갈, 미로, 달리와 같은 해외 거장들의 회화 작품과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 112점 등 세계적인 명화가 국내 미술관에 소장되어 문화의 국격을 한층 높였다. 여기에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유영국, 이응노 등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 또한 기증되어 그 역사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소장품들은 대부분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 기증되었으며, 일부는 박수근미술관, 대구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전남도립 미술관, 이중섭미술관 등 화가의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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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건희 컬렉션 TOP 30-명화 편》은 기증된 고미술품 2만 1,693점과 근현대 미술 작품 1,400여 점 중에서도 한국과 서양의 화가 열여섯 명의 명화 30점을 중심으로 엮었다. 작품을 보는 이건희 회장의 혜안을 깊이 있게 담아내기 위해 명화라는 주제에 한정했으며, 그가 특별히 사랑했던 한국과 서양의 화가들을 한데 모아 컬렉터로서의 균형 잡힌 철학을 드러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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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가의 사랑을 오래도록 받아왔던 작가 김환기의 걸작으로 1980년대 중앙일보사 신사옥 로비에 걸렸던 〈여인들과 항아리〉를 비롯해, 이건희 컬렉션에서 가장 많은 작품 수를 기록한 유영국의 작품들에 얽힌 이야기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열여섯 작가의 대표작을 포함해 모두 79점의 작품을 이 책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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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가의 경우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회자하는 작가들을 선정했다. 이건희 컬렉션은 한국 근현대 작가 238명의 작품 총 1,369점을 포함하는데 이 책에서 다루는 여덟 명의 작가는 현재까지도 회고전이 활발하게 열리거나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어 작품가를 갱신하는 등 작고 후에도 대중에게 소식을 꾸준히 전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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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화가 중 한 명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 〈책 읽는 여인La Lecture〉이 이건희 컬렉션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부드러운 곡선 처리와 온화한 색감, 그리고 꽃과 여인.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그림에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든 요소가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르누아르가 그린 대상은 주로 어린 소녀와 여성으로, 이들은 모두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마치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빛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도 그림에서 자연광이 느껴지도록 녹여낸 르누아르의 작품을 감상할 때만큼은 그 어떤 인위적인 표현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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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으로 소개된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Le Bassin Aux Nympheas〉은 화면 가득 수련으로 찬란하다. 일렁이는 물결로 수면과 하늘의 경계를 흐리고, 선명한 필치와 색감으로 아름다운 지베르니 정원을 한껏 담아낸 이 작품은 갈수록 옅어지는 붓질 로 수면 위에 떠 있는 꽃을 추상적인 형태로 보이게 한다. 이 연작의 표현 기법은 무엇보다 모네의 초·중반기 작업에서 보이는 집요함의 연장선이라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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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이 공개되면서 파블로 피카소에 대한 관심이 또 한 번 높아졌다. 그의 도예 작품이 무려 112점이나 기증 되었다는 소식에 놀라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기증품 가운데 하나인 〈검은 얼굴의 큰 새Gros oiseau visage noir〉 는 사용한 색채나 부엉이의 표정, 그리고 몸체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피카소스럽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비록 피카소가 많이 다루었던 여인을 그린 것도, 인물화나 사물을 분할된 형태로 그린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보아왔던 수많은 여인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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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종적을 감추었던 이중섭의 〈흰 소〉가 이건희 컬렉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그동안 자취를 알 수 없었던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이중섭의 ‘흰 소’ 연작은 5점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 기증된 이 작품이 그 다섯 작품 가운데 하나이기에 더욱더 가치가 크다.
--- p.180
이건희 컬렉션으로 공개된 작품 〈여인들과 항아리〉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반라의 여인들이 노점상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듯 웅크리고 앉아 있다. 각기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있거나 안고 있는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으며 심지어 몇몇 여인의 눈, 코, 입은 생략되었다. 평면적으로 그려진 모든 소재는 원근법을 벗어나 제각기 흩어져 있을 뿐 어떤 사건도, 장면도, 극적인 내러티브도 포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조형적 배치와 소재의 나열만으로 김환기가 관심을 가졌던 한국의 정서와 당시의 한국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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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화가’라고 불리는 박수근의 작품은 이건희 컬렉션에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중 〈유동〉은 박수근의 필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박수근다운 작품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공기놀이를 하듯 마당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 길바닥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순수함을 담아내는 동시에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삶의 실상을 한눈에 보여준다. 가장 왼쪽에 서 있는 소녀는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을 업은 채 다른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놀이에 끼지 못하고 대문 귀퉁이에서 서성이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린 소녀가 짊어진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이 작품은 박수근의 건강이 악화되던 말년에 제작되어 그가 작고한 1965년에 열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유작으로 출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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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미술의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평가받는 유영국의 작품이 이건희 컬렉션으로 소개되면서 대중들은 다시 한 번 유영국의 작품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 중 유영국의 후반기 작품에 속하는 1972년 작 〈작품〉은 해와 산, 그리고 빛을 도형으로 표현했다. 일정하지 않은 길이의 직선이 뻗어 나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빛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기호이며 굴곡진 산의 모습은 특정 위치에서 관찰한 것이 아닌 상상을 통한 재구성으로 시점이 불명확하다. 채색 또한 본질을 표현하기에 좋은 몇 가지 색만 추출하여 최소화한 점이 특징이다.
--- p.236
이응노의 〈군상〉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을 담아냈다면, 이건희 컬렉션에서 공개된 김기창의 〈군마도〉는 힘찬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림이다. 4폭 병풍으로 가로 길이가 5m에 달하는 이 압도적인 크기의 작품은 전시장 한쪽에 걸려 있는 것만으로 웅장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몸을 틀어 서로 부딪치고 역동하는 여섯 마리의 말은 묵법의 필치를 통해 거센 기운을 전달한다. (…) 육체가 고꾸라져 방향성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멈추지 않는 발길질과 지칠 줄 모르는 몸부림은 어쩌면 저항 의지일지도 모른다.
--- p.298~299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모두 경험한 그에게 우리 민족이 겪은 시련은 곧 예수의 고난과 같은 지점을 공유했을 것이다. (…)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 살이란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를 먹었겠는가.”
--- p.304
청각장애인 김기창의 아내이자 통역자로서, 네 명의 자식을 키운 어머니로서 작업할 시간조차 충분치 않았던 박래현의 삶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부분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방대한 양의 작품과 시기별로 보이는 다채로운 변화가 이에 답해줄 수 있을 듯하다. (…) 박래현의 작품을 전시회장에서 만나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작품 옆에 부착된 캡션이다. 석판화와 동판화, 메조틴트, 포토, 에칭 등 길게 나열된 작업 기법을 보면 재료를 손에 익히고 작업에 적용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지 그 노고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 p.317, 321
‘예수의 생애’ 연작은 김기창이 예수의 일대기를 한국적으로 각색해 마치 조선 시대의 풍속화처럼 그린 작품이다. (…)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 살이란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를 먹었겠는가.”
--- p.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