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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 오십엔 제주가 제철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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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3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228쪽 | 286g | 140*200*13mm
ISBN13 9788967821579
ISBN10 896782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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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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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잘 나가는 오십들처럼, 하던 일의 절정기쯤에 닿아 욕심 놓고 훌훌 긴 여행에 오르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나 당당할까요. 오십이 되어 돌아보니, 해놓은 것도 없이 몸도 마음도 습관도 감정도 다 못난 사람이 되어버렸더라구요. 감성지수는 우량하나 생활지수는 불량하고, 대면지수는 명랑하나 내면지수는 황량하며, 인성지수는 선량하나 비관지수는 치사량인 사람.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면 새 마음으로 곧장 내 세상이 열릴 줄 알았는데, 웬걸요. 오래 길이 든 관계와 오래 들러붙은 비루한 일상은 쉬이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나를 꼭 쥐고 있는 그 무언가! 그건 바로, 나였어요.

사는 건 쪼이고 마음은 펴고 싶었습니다. 나태한 몸은 다그치고, 조급한 마음은 뉘이고 싶었습니다. 웅크리지 말 것. 불안하지 말 것. 습관 같은 슬픔을 떨치고, 끈질긴 죄책감과 적당히 협상할 것. 너무 느긋하지 말 것. 너무 편안하지 말 것. 몸이 바빠 마음이 게을러질 것. 몸이 고되 마음이 덜 아플 것. 그리하여 연민과 비하는 이제 남의 것, 아니 없는 것. 그런 시간을 살아보려 제주에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꿈 없이 살 수 있냐고 중학생 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묻던 밤, ‘가난한 여행자가 되고 싶다.’고 노트에 적었다.

여행하며 ‘논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함한다. 마음이 놀아야 한다. 방랑해야 한다. 감정이 요동쳐야 한다. 자유로워야 한다. 덜 먹고 잘 놀고 살짝 취하는 여행이 시작된다. 배려할 동행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다.

바다를 보고 앉아 있자니 애쓴 걸음이 애쓴 삶 같았다. 삶의 어느 대목이 문득 억울하기도 했다. 억울함을 꺼내 보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나의 모든 감정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고, 지금의 여행은 그에 유용하다. 가식은 필요 없다. 지금 나는, 백 퍼센트 혼자니까.

헌책방 앞엔 나보다 먼저 사장님을 기다리고 계신 누군가가 있었다. 자전거를 앞에 두고 앉아계셨다. 미동도 없이 기다리신다. 투두둑 비가 오고, 길가에 사람은 적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니 여러 번 눈이 마주친다. 웃음이 오가고, 한두 마디 말이 오갔다. 며칠 전 책방에서 사전과 영어 학습서를 샀는데, 천 원을 덜 내서 그걸 전하려 주인장을 기다리신단다. 여행 중에 책방에 왔다 하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이 맑아요.” 주옥같은 말씀을 하신다. 눈을 맑게 하느라 애 좀 썼다.

길가에 개 떨듯 떠는 꽃이 있어, 무엇일까 찾아보니 이름도 딱 ‘개양귀비’다. 오들오들, 개 떨듯 떨지만 꺾이지 않는다. 내 몸이 쓸려갈 듯 바람이 거센데도 실처럼 가는 줄기에 매달린 꽃은 흔들릴 뿐 꺾이지 않는다. 바람이 걱정돼 나설까 말까 고민했더랬다. 꽃도 서 있는데, 바람에 꺾일까. 바람이 분다고, 나를 향해 부는 것이 아닌 것을. 겁먹고 살지 말자. 셀프 과보호는 이제 그만. 개 떨듯 떨더라도, 뛰쳐나오고, 걷고, 살자.

올레 리본이 보이면 마음이 놓인다. 리본이 날리면 마음도 날린다. 삶의 길에도 갈림길마다 리본이 달려있다면, 사는 게 쉬울까? 나는 누군가에게 리본이 되어준 적이 있던가? 사는 건,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내 삶의 리본은 내가 매는 수밖에. 믿고 가는 수밖에.

몸을 펼 수 없는 바람과 거뭇한 구름에 속까지 차고 시리다. 혼자라 쓸쓸하고, 혼자라 좋은 그런 날이었다. 그런 걸음이었다. 대단한 생각 같은 거 없이, 머릿속이 가벼워 몸도 가벼워진 듯. 대책 없이 느려, 영혼도 따라오기 쉬운 걸음이었다.

나란히 손잡고 걷지는 않지만 걸음의 속도는 잘 맞는다.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한다. 재촉하지 않고 너무 처지지 않으려 적당히 간격을 맞춘다. 오래 산 부부의 산책은 딱 그 정도면 좋다.

때로는 눈앞의 욕심을 놓지 못해 자신의 한계를 그만 넘어서게 되고, 그래서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물속에서 숨을 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물숨이다. 물숨은 욕심의 숨, 해녀들에겐 그래서 죽음을 의미한다. 눈앞에 아무리 큰 전복이 있어도, 행여 그것을 캐던 중이라도 숨의 한계에 다다르면 주저 없이 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손안에 들어온 욕심을 놓기가 어찌 쉬울까. 그들이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부렸다는 그 욕심이 우리네가 벌이는 욕심에 비해 너무 소박해서, 그런데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해서 무참하다. 공평하지 않다, 삶은, 결코.

거친 걸음이 제주를 해친다. 격렬한 속도가 지구를 해한다. 안아주는 마음으로 제주를 걷고, 해처럼 느린 걸음으로 발자국 없이 지구를 스쳐 가야겠다. 적어도 나만의 이동을 위한 탄소발자국은 남기지 않으려 걷고 버스 타며 스치듯 여행하고 있다. 지구가 애틋하고, 내일은 불안하다.

오름 오르듯, 한 오름 한 오름, 잘 쳐내며 살았어야 했다. 살아야 한다. 오르지 못하고 스쳐 지나온 오름이 많다. 해낼 수 있는데 못해낼 거라 지나친 과업들이 많다. 이제는, 다시 오름. 다 오름. 삶에 좀 더 오름. 때로는 악착같이 때로는 한량하게, 오름 또 오름.

지금의 나는 계획도 없고 진행도 없다. 나조차도 배려하지 않는다. 힘들이는 일 없이 시간이 지나간다. 구름의 속도로, 바다의 마음으로, 나무의 숨으로, 길의 이야기로. 나는 여행을 곧잘 한다. 혼자일 때 더 잘한다. 가난하고 자유로운 여행. 하찮은 그러나 괜찮은 여행.

돌아보면 유난이 심했다. 비가 온다고, 바람 분다고. 먼저 걱정하고, 오래 걱정하고. 상처는 길고, 혹시 까먹을까 도로 꺼내서 아픈가 안 아픈가 살피고, 그러다 보면 더 아프고. 예민함보다 더 짜잘하게 끓는 소심한 유난함에 지칠 때가 많았다. 어쩌면 이 여행도 유난함의 결과일지 모르겠다. 쏟아지는 비를 내쳐 맞다 보니, 이 큰비도 그리 유난 떨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막걸리 한 잔에 상장 같은 위대한 점심을 먹고 숙소로 가는데 풀이 누웠다. 한 포기 한 포기 세워주고 싶었다. 애썼다, 니들도.

늙어 쓰러진 나무는 짠하고 아침 추위에 가늘게 떨고 있는 새도, 가녀리게 돋은 연두 이파리도 애잔했다. 죽어도 산 것 같은 누운 나무는 살아있는 듯 꿈틀대며 근육 같은 결로 살아온 날을 드러낸다. 거죽을 덮은 이끼는 나무의 혼을 감싼 듯하다. 나는 놀러 온 게 아니라 자연이 되려 왔나 보다.

왜 그리 두근거리며 살았을까. 작은 것 하나 결정할 때마다, 실행할 때마다 심장이 격했다. 예정된 일이 있어도 불안했고, 없어도 불안했다. 잘 가다가도 잘못 든 길일까 봐, 잘 되는 일에도 곧 잘못될 것 같아 초초했다. 행여 주변을 챙기지 못할까 봐, 혹은 너무 챙기느라 내가 사라질까 봐 근심했다. 그러다 보면 콩콩콩, 심장이 빨라졌다. 느슨한 일상과 느린 걸음, 푸근한 자연은 걸음을 잡아주었다. 나하고만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생활은 안팎으로 여유를 주었다. 심장이 느려졌다.

어쩌면 오십 즈음이 여자 혼자 제주를 여행하기 가장 적합할 나이가 아닐까. 종일 걸어도 될 만치 비교적 기운은 충만하고, 육아나 업에서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여자, 엄마, 아내에서 멀어짐에 서운함이 없다. 뚜벅뚜벅, 나를 향해 걸어 들어갈 만한 나이다.

혼자 걷는 걸음은 사유로 이어진다. 걸음과 사유와 고독이 어우러지며 나와 자연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든다. 지쳐도 아파도 더 걸을 수 있는 것은 걷겠다는 의지 그 이상의 것, 가장 아래 걷는 발과 가장 위 영혼, 그것을 둘러싼 자연의 합일에서 오는 충만감이 아닐까.

세상이 온통 슬펐다. 슬픈 일이 이리 많은데 다들 어찌 그리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슬픔에도 에너지가 든다. 슬픔도 습관이 된다. 남의 슬픔을 끌어다 슬퍼하고, 남을 위로하느라 나를 위로하지 못하고 살았던 날들. 많이 듣고 많이 위로하며 살았다. 이제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런 호의도, 그럴 에너지도. 여러 면에서 나는, 지쳤다. 꼭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오십의 나를 서운해하는 남편에게, 왜 예전 같지 않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비로소 나의 말에 귀 기울이는 나에게. 더는, 남을 위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요. 붉은오름의 가운데에, 나는 그런 말들을 묻고 왔다.

지금은, 생의 전환점이야. 반을 살았고, 반을 더 살 거야. 생의 더듬이를 조금 더 나를 향해 세워두면, 나머지는 다 별 게 아니다. 나무처럼 풀처럼 물처럼 흙처럼, 중심을 잃지 않고 맡은 생의 시간을 잘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삶은 죄가 되지 않는다. 분화구의 가운데에 여행의 진심을 묻고 왔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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