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아내와 불화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감히 아내라는 여자와 불화할 생각을 먹는단 말인가? 차라리 시대와 불화한다면 몰라도. 시대와의 불화라……? 거 참, 멋들어진 말이긴 한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딱히 뭐라고 이름붙일 만한 시대도 아니질 않는가. 설령 요즘이 무슨 시대라 해도 그것에 관심을 기울일 염(念)이 없으니 불화 운운하긴 역시 어쭙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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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아주 좋아하시는 군요?'
앞자리에서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보나마나'자영과 건강'이나 '신비의 식품세계'등 건강관련 책자나
무슨무슨 기 수련회를 소개하려는 사람이 아니면, 신도시 근처에 난립한 신흥교회에서 영적체험의 놀라운 은혜를 받으라고 꼬드기러 온 사람들이이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병원의 약국 창구에 처방전을 접수시킨 나는 대기실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수족관 옆에 앉아 있었다. 수족관의 좁은 공간에는 어른 팔뚝만큼 살진 잉어 일곱 마리가 비둔한 몸뚱어리를 꿈틀거리고 잇었다. 은빛 잉어가 다섯마리. 황금빛 잉어가 두 마리였다. 나는 황금빛 잉어가 나를 향해 큰 입을 쩍 버릴 때마다 되도록 목구멍 안을 깊숙이 들여다보기 위해서 엉덩일 들썩이며 옆이마를 수족관 유리에 대곤했다.
'아니면 구멍을 좋아하시는지요......?'
'......!'
이 도발적인 말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번쩍 들었다.
--- p. 131
도망치듯 서둘러 빠져나온 뒤론 거진 달포쯤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사건이 많이 터져 신문사 일에도 바빴고 왠지 그녀를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그때 들은 오빠 얘기 때문인지, 자구만 그녀가 나에게 함정을 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녀는 또다른 자전거가 생겼구나. 그렇지! 다른 자전거를 훔치는 도중이군.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 p.128-129
너는 벌레가 무어라고 생각하니? 차분히 들여다보면 그것들도 너히들처럼 움직이고 뭔가를 결정하고 기분좋고 언짢은 것도 똑같이 느끼는 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알게될게야.
하지만 벌레들은 무조건 더럽고 추하고 밟아 죽여도 시원찮은 것들이쟎아요?
어떤생명이든...
만약에 조물주가 계시다면, 그런 쓰잘데 없는 건 애초부터 만들지도 않았을 게다. 버러지는 우리 인간의 눈에만 버러지 같은거지.
그럼 그런 생명체를 왜 잡아 먹어요?
원래 생명이... 생명을 먹고... 그것이 또 생명을 낳고...
그녀는 분명 나를 봤지만 아주 차가운 눈길로, 아니 차갑다기보다는 낯선 사람을 대하는 눈길로 스쳐갔다. 실수였을까? 그러나 난 그녀가 타고 스쳐간 자전거에 물끄러미 눈길이 닿는 순간 퍼뜩 깨달았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나와 그녀를 향해 움직이려다 중동무이로 멈춰버린 내 오른손바닥을 뒤집어 맥없이 바라봤다. 자꾸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하! 그렇구나. 그녀에게 또 다른 자전거가 생겼구나 그렇지! 다른 자전거를 훔치는 도중이군.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나는 서둘러 허둥지둥 자전거 전용도로를 벗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 p.128-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