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운 침묵이다. 노년은 절규하는 절망이다. 그렇지만 노년은 중요한 주제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와 관계된 중대한 주제다.
--- p.17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몸이 더 잘, 더 깊이 응답한다고 덧붙여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망각된 몸’을, 심장 박동을, 땅을 딛는 맨발을, 그리고 어쩌면 유년기에서 시작되었을 내면의 리듬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 p.43
나이와 노화를 피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양한 나이를 지녔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외부에서 부여하는 지위에 붙들린 포로 신세다. 우리는 무한히 젊으면서 늙었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부재로 인해 축소되어 무한히 유한하다.
--- p.56
늙는다는 건 젊음이 우리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걸, 시간이 젊음을 고스란히 남겨두었다는 걸 잊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늙어도 우리의 기쁨은 젊으며, 우리의 고통 또한 젊다. 노년은 과거에 맛본 모든 행복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다. 우리의 신분증을 제시해야 할 창구가 아니다. 노년은 부동성이 아니라 항구적인 움직임이고, 우리가 닻줄을 풀고 떠나는, 위험하지만 즐거운 여행이다. 천진함을 고수하고 계속 자기 자신으로 남는 여행.
--- p.65~66
조르주 상드는 자신이 늙어가는 걸 보며 결코 불평하지 않는 여유와 기쁨을 누린다. 그녀는 이 변화의 결과를 편지에 세심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돌아오지 않고 지나가고, 우리는 졸졸거리며 흐르는 물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들을 비추었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노래했으니 충분히 흐르고 충분히 졸졸거렸지 않았나? 이제는 계속하려니 지루하고, 다시 시작하자니 겁날 것이다. 우리는 홀로, 슬프게, 생각에 잠긴 채, 그러나 조용히, 언제나 조용히 늙는다.”
--- p.123
나이는 우리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재능을 주기도 할까? 일부 예술가들, 특히 음악가들, 화가들, 작가들은 이론의 여지 없이 천재성에 가까운 ‘뒤늦은 작품’을 내놓는다. 흘러가는 세월의 결과가 아니라, 여러 재능 가운데 예술가에게 뿌리를 내려 말년에 이르러서야 꽃을 피우는 재능인, 노년의 스타일이라는 게 확실히 존재한다. 이를테면, 티치아노가 생애 말기에 깊이 파고드는 빛을 발견한 것. 또는 렘브란트와 고야 모두 한창 나이가 지나고 나서 마치 형이상학의 한 형태에 도달한 듯,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든 것이 그렇다.
--- p.147~148
예순 살에도 스스로를 열여덟 소녀처럼 젊게 느끼고 노화를 축복처럼 바라보던 그녀는 자기 노트에 이렇게 적는다. “요즘 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좋다. 그들이 소박하고 자주 슬프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스스로 추하다고 느끼고 발버둥 친다. 사실 그들은 추하지 않고, 폭풍우를 겪고 살아남은 나무들처럼 흥미롭다.”
--- p.151
나는 내 젊음을 되찾고 싶지 않다. 결코. 나는 과거의 향수에 젖지 않는다. 내가 예전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조금 느려졌다. 길을 건너기 위해 빨간불로 바뀌길 기다리고, 가방에서 열쇠를 찾지 못하고, 전날 어디에 주차했는지 잊고, 약속 날짜를 헷갈리고, 더는 매일 저녁 외출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그만큼 현명해지지는 않았고, 방역 통제 때문에 빼앗긴 이 초봄에 내 창가에서 바깥 거리의 나무들에 돋아난 봉오리들을 보는 기쁨이 감소했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는다. 이 새로운 시작에 내가 온전히 가담하지 못하는 건 늙어서가 아니다. 그렇지만 매년 봄은 애절하다. 내가 살 봄이 얼마나 남았을까?
--- p.160
흔히들 노년은 인생의 저녁이라고 말한다. 왜 어두울까? 오히려 빛이 이토록 강렬한 적이, 심지어 눈부신 적이 없었다. 노란 부표 너머까지 헤엄치고 싶고, 산길을 걷고 싶고, 내려올 때 무릎이 아픈데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느 정도 짧은 시일에 내게 닥칠 일을 예리하게 인식하며 현재를 향유한다. 앞날이 어떻게 변할지도 알고 싶다. 나 자신이 되어가나?
--- p.167~168
20세기의 큰 진척은 노화와 건강이 함께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무한히 늙을 수는 없다. 노화는 덤으로 얻는 삶이고, 아직 마르지 않은 저수지이고, 삶을 찬미하고 확대하는 방식이다.
--- p.201
나는 노화의 ‘중립성’을 호소한다. 짊어지기에 무거울지 모를 과잉보호를 호소하는 게 아니라, 노화를 두려움과 경계심이 아니라 강하고 활동적인 가치로 여길 사회를 호소한다. 노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갈망할 수 있기를 호소한다. 곳곳에서 노년에 가해지는 폭력, 우리 문명의 실패를 말해주는 기호인 폭력을 멈추길 호소한다.
--- p.220
노화는 가장 취약한 약자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폭로한다. 사실 노화는 가장 불안정한 이들에게 더욱 힘든 체험이며, 여성들은 이 이중의 소외를 최전선에서 겪고 있다. 노년은 불평등이 나날이 더 명백하게 드러나는 삶의 시기이다. 오직 특혜받은 이들만이 행복한 노년을 누릴 수 있는데, 그런 이들은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영위해온 직업에 따라 정도의 차이를 두고 늙는다. 보부아르는 책 말미에서 묻는다. “노년에 인간이 인간으로 남으려면 사회가 어떠해야 할까?” 그리고 대답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어야 한다.”
--- p.224
정말 내가 늙는다는 사실을 정말 생각지 않고 계속 살아가게 될까? 나는 내가 젊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사회가 내 나이를 이유로,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해주는 자아의 지속성이라는 감정을 앗아가는 걸 원치 않는다. 내 삶에서 오랫동안, 나이 든 사람은 타인들이었다. 오늘날 나는 그 타인들의 일원이 되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고, 심지어 꿈에서조차 그러지 못했다. 나는 세상에 대한 욕구를 간직하고, 매일 삶의 짠맛을 발견하고, 보부아르의 수준에 도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관찰했다. “나는 타인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 자신으로 남는다.”
---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