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다른 대륙에서 중년을 맞이했고, 아버지가 최근에 돌아가시면서 나의 한 부분까지 같이 가져가셨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에, 나는 조용히 나를 압도하는 향수에 사로잡혔다. 나는 어린 시절의 마술 같은 곳에, 매키낙 섬, 로키 산맥, 게티즈버그 등지에 다시 가 보고 싶었고, 이들이 내 기억처럼 지금도 근사하게 남아 있는지 보고 싶었다. 록 아일랜드의 기관차가 나지막한 경적을 길게 내뿜고 철커덩거리며 조용한 밤공기 속으로 사라져 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반딧불이도 보고, 강렬한 매미 소리도 듣고 싶었다. (…) 니하이 콜라와 버마 셰이브 면도 크림이 그려진 광고 표지판을 찾아보고, 야구 경기장에 가고, 대리석 상판을 깐 탄산 음료수대에 앉아보고, 영화 속에서 디애나 더빈과 미키 루니가 살았을 것 같은 작은 마을들을 차로 다녀보고 싶었다. 여행하고 싶었다. 미국을 보고 싶었다. 집에 오고 싶었다.
--- pp.21-22
계속 뭔가 허전하다 싶었지만, 뭐가 빠진 건지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바로 대형 광고판들이었다. 내가 어릴 땐 가로가 10미터, 세로가 5미터가량 되는 광고판들이 도로변 들판에 높이 걸려 있었다. 아이오와나 캔자스 같은 곳에서는 가도 가도 허허벌판이라 이런 광고판들이 유일한 자극이었다. 1960년대에 버드 존슨 여사께서는 영부인들이 종종 잘못 알고 시작하는 다른 캠페인들처럼 고속도로 미화사업을 벌였고 그 일환으로 이런 광고판들을 폐기시켰다. 로키 산맥 같은 곳이었다면 광고판 제거로 미화가 되겠지만, 이곳 외로운 중부에서 광고판들은 사실 공공 서비스나 마찬가지다. 1킬로미터 전방에 표지판이 서 있는 게 보이면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가 궁금해지고, 광고판이 가까워 오고 지나치는 동안 유심히 쳐다보게 된다. 운전 중 재미로 치면 그건 펠라의 작은 풍차들과 동급이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낫다. 잘 만든 광고판들은 입체적이기까지 했다. 유제품에 관한 거라면 소머리가 튀어나와 있기도 하고, 볼링장 광고라면 볼링 핀들이 흩어져 있는 그림이 붙어 있기도 했다.
--- pp.74-75
자랄 때 우리는 개틀린버그 같은 곳에는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곳에서 한 시간을 보내느니 블랙 앤 데커의 전기 드릴로 뇌수술을 받겠다고 하실 분이었다. 휴가 때면 방문지의 가치를 가늠하는 아버지의 척도는 단 두 가지였다. 교육적인가? 그리고 공짜인가? 개틀린버그는 둘 중 어느 편도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휴가지로서 천국은 입장료 없는 박물관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만나본 중에 가장 정직한 분이지만, 휴가는 이런 원칙에 대해 눈을 감게 만들었다. 여드름이 얼굴을 덮고 턱에는 수염이 송송 올라오기 시작했는데도 아버지는 매표소에서 내가 여덟 살이라고 우기셨다. 휴가 때면 하도 짠돌이가 되시다 보니 우리더러 쓰레기통을 뒤져 점심을 해결하라고 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니 내게 개틀린버그는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나는 마치 동전 한 자루와 함께 라스베이거스에 풀어놓은 신부님이 된 기분이었다. 온갖 소음과 번쩍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방에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가능성들이 날 어지럽게 만들었다.
--- pp.135-136
나는 대체로 원칙을 믿지 않는 편이지만(무원칙의 원칙이 내 원칙이다) 매식에 있어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 원칙을 준수하고자 한다. 1. 파는 음식의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는 식당에서는 절대 먹지 않는다.(하지만 불가피하게 먹어야 할 때는 절대 사진을 믿지 말라.) 2. 볼링장 부속 식당에서는 절대 먹지 않는다. 3. 부숭부숭한 털북숭이 벽지를 바른 식당에서는 절대 먹지 않는다. 4. 주방의 말소리가 들리는 식당에서는 절대 먹지 않는다. 5. 이름에 특정 단어(행크, 리듬, 스윙, 트리오, 콤보, 하와이언, 폴카)가 들어간 생음악 연주 밴드가 있는 식당에서는 절대 먹지 않는다. 6. 벽에 핏자국이 있는 식당에서는 절대 먹지 않는다.
--- p.230
아버지는 운전하실 때면 대략 매번 길을 잃으셨다. 대개는 길을 살짝 잃지만, 우리가 가려는 곳에 가까워지기만 하면 예외 없이 심각하게 길을 잃었다. 게다가 대체로 한 시간쯤 걸려야만 1단계인 살짝에서 2단계인 심각하게로 옮아갔다는 걸 깨닫는다. 낯선 도시에서 아버지가 우물쭈물하면서 갑자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방향을 홱 돌린다든가 일방통행로에서 반대 방향으로 돌진하거나 번잡한 교차로에서 머뭇거린다고 다른 차들로부터 꽥 하는 경적 소리를 들을라치면 어머니가 온화하게 제안하시곤 했다. 차를 어디 대고 길을 물어보자고.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을 못 들은 척하면서, 일이 안 풀릴 때면 아버지를 사로잡곤 하는 반 집착 상태로 계속 길을 고집하셨다. 같은 일방통행로를 몇 번이나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서 가게 주인들이 다가와 문간에서 지켜보기 시작할 때에야 아버지는 차를 멈추고 심각하게 선언하셨다. “음, 아무래도 길을 물어봐야겠다.” 계속 그러고 싶었던 게 분명한 목소리로 말이다.
--- pp.274-275
30~40킬로미터마다 히치하이커가 보였는데 가끔 인디언도 있었지만 가방을 잔뜩 든 백인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는 히치하이커를 거의 못 봤는데, 여기에는 아주 많았다. 남자들은 위험해 보이고, 여자들은 맛이 가 보였다. 나는 유랑자들의 땅에 접어들고 있었다. 공상가, 실패자, 부랑자, 정신병자들, 미국에서 이들은 언제나 서부로 간다. 이들은 서부 해안지역으로 가면 영화배우나 록 스타, 퀴즈쇼 우승 같은 걸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딱한 생각을 갖고 있다. 뭐 일이 잘 안 풀리면 언제든 연쇄 살인범이 될 수도 있고. 동부로 가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게 신기하다. 공인회계사랄지 기업매수로 한탕 하기 위해 뉴욕에 가겠다고 엄지를 들어 올린 히치하이커들은 백날 가야 만날 수 없다.
--- pp.305-306
갑자기 이 여행이 끝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지금 다시 차에 타면 한두 시간이면 마지막 언덕에 오를 것이고 마지막 모퉁이를 돌면 미국을 돌아보는 일이 어쩌면 영영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지갑을 꺼내 들여다봤다. 거의 75달러나 남아 있었다. 미니애폴리스까지 가서 미네소타 트윈스 팀의 야구 경기를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탁월한 생각 같았다. (…) 야구 경기의 본질은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며, 어느 선수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 아는 데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이제 외국인이었다. (…) 여종업원은 의심스러운 듯한, 하지만 친절한 눈길로 나를 옆으로 쳐다보았다. “여기 사람 아니죠, 그렇죠?”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닙니다, 아쉽게도.” 나는 살짝 생각에 잠긴 채 대답했다. “그런데 이곳이 너무 좋아서 가끔은 여기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 pp.389-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