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지구인정신과 정신문명시대를 시작하는 12가지 인식의 전환
1장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의 자유
우리는 배우는 데 너무나 익숙해 있다. 배운 대로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때로는 죄의식 까지 느낀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강박이 우리의 삶을 점점 더 조각내고 더 의존적으로 만드는 건 아닐까? 그러나 삶의 가장 중요한 일들,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 잠자는 일들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선택이다. 배움은 선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선택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나는 아직 잘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2장 태어난 것은 축복이 아니다
왜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걸까? 진정한 행복은 더 행복한 삶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과 행복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행?불행을 넘어선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 그것이 참행복이다. 기본적으로 삶은 허무요, 고통이다. 정말로 생명의 근원을 자각하고자 한다면 삶의 공허감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공허감을 직시하고 삶이 그 뿌리에서부터 허무요 고통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아는 것이 깨달음의 시작이다. 그리고 허무의 자각에서 생겨난 근원적인 물음들을 어떤 행복한 순간이나 불행한 순간에도 놓치지 않는 것이 구도의 핵심이다.
3장 섬기는 신에서 활용하는 신으로
신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구성하는 정보이며, 우리가 가진 집단의식의 표현이다. 신의 이름으로 실현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욕구와 소망이다. 우리의 욕구를 채울 수 없는 곳, 우리의 지성이 끝나는 곳이 신의 나라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 신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니다. 신이 우리를 자신의 모습대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모습대로 신을 창조한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선택하고, 그 선택을 현실화하기 위해 신을 활용하라. 신은 우리가 모셔두고 섬길 대상이 아니라 창조의 도구로서 마음껏 활용할 대상이다. 우리는 신이라는 정보의 주인이다.
4장 생명의 새로운 정의, 심장에서 뇌로
질료質料와 에너지, 정보는 우리의 몸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세 가지 바탕이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갖는 자기 정체성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육체?에너지체?정보체라고 부른다. 이 중에 가장 고차원적인 활동이 정보의 생산이다. 우리가 자신을 정보체로 인식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체험적 이해를 의미하며, 근원적인 실체에 대한 자각, 정보를 만들어내는 주체에 대한 자각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육체를 넘어 에너지체와 정보체로까지 확대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성숙하고 수준 높은 죽음의 문화를 갖게 될 것이고, 심장과 혈액이 아니라 뇌와 정보를 생명의 상징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생명을 가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5장 0점을 회복하라
역사적으로 현명한 왕들은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거래의 기준이 되는 저울, 자, 되를 통일했다. 대부분의 갈등과 분쟁이 불공정한 거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자체가 거래이므로 올바른 가치기준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삶의 영역에서 바른 거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자신이 완전한 저울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의 무게 때문에 저울 눈금이 0에 맞춰져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나 다 처음에는 완전한 0점에서 출발하지만 다양한 삶을 거치며 무수히 많은 저울질을 하는 동안 0점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 위에 무엇을 올려놓고도 올려놓은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가치를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중심가치는 개인의 인격이나 관념, 사상, 종교, 민족을 초월한 지구밖에 없다. 지구를 중심에 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0점을 가리키는 공평한 저울을 가질 수 있다.
6장 지구의 입장에서 선민은 없다
모든 생명현상은 자신의 노력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이미 특별하다. 피는 꽃마다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남과 비교하여 더 특별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함께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즉, 열등감의 표현이고 왜곡된 에고의 표현이다. 이러한 강박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신이 자신을 특별히 선택했다는 선민의식이다. 신은 그 민족의 신념체계의 일부이고 그 민족의 집단의식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선민의식은 일종의 왜곡된 자기 사랑일 뿐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 가치체계와 지구인의 의식이다. 지구에게는 모든 인류가 지구인이고, 인류는 지구에 터전을 두고 사는 수많은 생명체 중의 하나이다. 지구의 입장에서 선민은 없다.
7장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순간의 재미와 행복을 추구하며 살다가도 문득 뒤돌아보면 불안하고 초조하며, 세상사에 초연한 듯 맑고 고요하게 살다가도 문득 뒤돌아보면 권태롭고 허망하다. 우리의 삶은 0에서 시작해서 0으로 돌아가는 대순환의 일부이다. 허공에서 일어나 허공으로 사라지는 생명전자의 운동이다. 실체實體 진리란 생명전자의 운동을 통해서 무와 유가 드러나고, 그 둘이 구분되고, 구분되면서 동시에 연결되는 이 모든 과정이다. 그렇다면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삶이 그러함을 알고, 존재의 뿌리를 허공에 두고, 가슴에는 찬란한 비전을 품고, 지금을 의연하게 사는 것이다. 아무리 큰 깨달음을 얻고 아무리 높은 지혜를 얻어도, 정직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사는 것 외에 달리 바른 삶의 방법은 없다. 이것이 내가 아는 도道의 요체이다.
8장 힐링할 것인가, 킬링할 것인가
수백만 년을 큰 변화 없이 진화의 길을 걸어오던 인류는 4만 년 전부터 빠른 진화의 조짐을 보이다가 1만 5천 년 전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갑자기 대뇌피질이 커지면서 놀라운 지성과 창조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과 4만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지구의 지배종으로 부상하여 종種의 패권을 휘두르며 독재자로 군림해 온 인류는 과연 이 지구에 얼마나 더 오래 머물 수 있을까? 인류의 생존여부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 힐링할 것인가, 킬링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이 중 어느 한쪽을 택하여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 어느 쪽인지는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면 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힐링하고 있는가, 킬링하고 있는가?
9장 정신문명을 여는 새로운 언어, 기氣
말로 표현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우리는 말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이름 있는 것들만 본다. 사물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이름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기술을 전하는 수단으로서는 훌륭할지 모르나 진리를 담는 그릇이 되기에는 너무 작다. 살아 움직이며 쉼 없이 흐르는 진리를 잡는 그물이 되기에는 너무 성기다. 언어가 채우지 못하는 존재의 무한간극, 그 빈틈을 채워주는 언어가 기氣이다. 기는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는 자유로운 생명의 언어, 느낌의 언어, 영혼의 언어이다. 우리는 기를 통해 언어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생명의 섬세한 결들을 알게 되고, 비로소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교감이 가능하며, 에너지의 흐름을 타고 전해지는 모든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 기는 새로이 열리는 정신문명시대에 민족과 종교, 사상,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널리 쓰일 새로운 언어이다.
10장 도인이 되는 세 가지 공부
많은 사람들이 책임지기가 두려워 자신의 앎을 인정하지 않고, 앎을 인정하고도 애써서 무엇이 옳은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무엇이 옳은지 알아도 옳은 것보다 편한 것을 선택하고, 바른 선택을 해도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깨달음은 선택이지만, 도인이란 자신이 선택한 깨달음을 실천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다. 자신 안에 있는 완전한 앎을 자신의 실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정직한 사람이다. 이것을 위한 세 가지 공부가 있는데, 원리공부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수행공부는 자신이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 그 앎을 자신의 근육과 세포에까지 각인시켜 삶이 진리가 되게 하는 것이며, 생활공부는 깨달음을 사회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혼의 완성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성장시키는 공부이다. 진정한 완성에 이른 사람에게는 사회적 자아와 공동체적 자아가 있을 뿐, 전체와 구분되고 다른 개체와 대립되는 개인적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1장 철난 부모가 만드는 홍익가정
1988년 세계보건기구는 ‘육체적 · 정신적 · 사회적 안녕’이라는 건강의 정의에 ‘영적 안녕’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것은 우리가 영양 상태나 평균수명 등으로 설명되지 않는 건강의 차원이 있고, 그것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소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 원래부터 주어져 있는 완전성이며 깨달음인 영성을 회복하고 영적인 건강을 도모하는 것은 목적의 상실과 가치의 부재, 의미의 빈곤으로 특징지워지는 우리 사회의 깊은 질병을 치유하는 열쇠이다. 이것을 일상 속에서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홍익가정운동이다. 건강한 사회는 건강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시대의 건강한 가정이란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 더불어 사는 이웃, 더 나아가 인류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홍익정신, 지구인의 의식을 가진 가정이다. 그럴 때 비로소 가정이 사회를 치유하고 지구를 치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홍익가정의 부모는 가족의 건강을 스스로 지키고, 자녀교육의 기본을 스스로 책임지며, 가정을 신나는 놀이터로 만든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 즉시 ‘철나는 것’, 자신이 한 가정의 부모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12장 문명전환,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으로
10년 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닌 미래를 열어두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나는 ‘문명전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현재 우리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대립적 2원론을 극복하고, 2원을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 잃어버린 중간인 제3원을 되찾음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을 조화의 주체로 새롭게 자각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3원 철학의 핵심이다. 물질을 목적으로 삼는 문명에서 혼의 성장을 위해 물질을 활용하는 문명으로, 파괴력을 힘으로 보는 문명에서 치유력을 힘으로 보는 문명으로, 단절되고 소외된 문명에서 지구 전체와 전일적으로 교류하는 통하는 문명으로. 이렇게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으로 가는 문명전환의 주체는 영성?지구인정신?홍익정신을 가진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