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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밤

용서받지 못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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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3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440g | 137*197*22mm
ISBN13 9791130681429
ISBN10 113068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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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로 땅에 널브러진 에쓰코. 춤이라도 추듯 기묘한 방향으로 내뻗은 팔다리. 경차에서 내린 나이 든 여자는 망가진 기계처럼 온몸을 떨었다. 산산이 부서진 경차의 앞 유리창. 그 앞 유리창을 깬 물체는 박살 나서 아스팔트 위에 흩어졌다. 갈색 흙. 자홍색 꽃. 흰색 도자기 조각. 그 조각 중 하나에 ‘엉겅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내가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한 사이에 구급차는 달려갔다. 맨션 계단을 뛰어올라 집에 들어가자 유미가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아빠 꽃, 쑥쑥 클 거야.” 자랑스럽게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꽃은 해님을 봐야 쑥쑥 커진대.”
하지만 베란다에 화분은 없었다.
--- p.13~14

― 돈을 좀 마련해줬으면 해서 말이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대는 미리 준비해두었음이 분명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보이스피싱이 제일 먼저 떠올라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말이 귀에 들어온 순간 손이 멈췄다.
― 비밀을 알아.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싸늘해졌다.
― 자세히 말하면 내 정체도 들통 날 테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고를 친 건 당신 딸이야.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감췄고. 지금까지 쭉.
그리고 남자는 마치 비장의 카드를 내밀듯 이렇게 말했다.
― 엉겅퀴를 키운 것도…… 난 다 알아.
--- p.31

나와 누나가 번개에 맞은 날, 늦은 밤에 구급차로 실려 온 사람은 구로사와 소고, 아라가키 다케시, 시노바야시 가즈오, 그리고 병원장 나가토 고스케였다. 심한 설사와 구토 증상으로 보건대 식중독일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즉시 위세척을 하고 항생제를 투여했다. 그러자 증상은 일단 진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명 모두 온몸에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다음 날 아침, 아라가키 금속 사장인 아라가키 다케시가 죽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마을에서 가장 큰 버섯 농가 주인인 시노바야시 가즈오가 죽었다.
남은 두 명, 석유 부자인 구로사와 소고와 나가토 종합병원 원장인 나가토 고스케는 목숨을 건졌지만, 상태가 회복되지 않아 계속 입원 치료를 받았다. 경찰 수사 결과, 네 사람은 흰알광대버섯을 먹고 중독되었음이 밝혀졌다. 산속에 자생하는 무서운 독버섯으로, 그 지방에서는 ‘저승사자’라고도 불린다.
--- p.74~75

편지 내용에 따르면 다라베 요코는 신울림제가 열리는 날 이른 아침에 아버지가 신사 작업장에 숨어들어 라이덴국에 하얀 물체를 넣는 광경을 보았다. 아버지가 떠난 뒤 다라베 요코는 당장 냄비 속을 확인해 그것이 버섯임을 알았다. 그때 맹독이 있는 흰알광대버섯일 가능성도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다라베 요코는 국을 버리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국에 버섯을 넣었다는 사실도 밝히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열린 신울림제에서 라이덴국을 먹은 네 명 중 두 명이 죽고, 두 명이 중태에 빠졌다. 자신은 그 죄를 짊어지고 살아갈 수 없다. 이 편지는 버려도 상관없고, 모든 것은 본인에게 맡기겠다. 다만 가족을 생각해주길 바란다.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 p.82

같은 시기에 아버지는 그때까지 죽을 둥 살 둥 모은 돈으로 새 일식 요리점을 차리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아침을 먹은 뒤 좌식 탁자에 펼쳐놓은 건물 평면도는 예전 가게였던 하나처럼 1층이 점포, 2층이 집이었다.
“여기서 인생을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야.”
아버지가 오랜만에 우리를 보고 웃었다. (중략)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면 혹시 아버지와 누나의 관계도 달라지지 않을까. 물론 팽팽한 집안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가지야 않겠지만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그런데 그때 누나가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입을 열었다.
“아빠는 그럴 자격 없어.”
둘의 대화가 단절된 이래, 처음으로 누나가 아버지에게 똑똑히 꺼낸 말이었다. 아버지를 향한 누나의 두 눈은 회색빛처럼 탁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나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사건 당일 아침에 아버지가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고 증언한 건 다름 아닌 누나인데.
--- p.88

― 네놈 대신에 아이들이 벌을 받은 거다. (중략)
그 뒤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사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매일같이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 마을 남자가 건조한 눈빛과 함께 무책임한 말을 던진 뒤, 느닷없이 귀에 들어온 목소리다. 차에 올라탄 아버지가 차 키를 돌리기 전에 핏기 없는 입술을 달싹여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나는 분명히 들었다.
― 난 틀리지 않았어.
--- p.91~92

“살의는 분명, 언제나 수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겁니다. 그 대부분이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그저 운이 좋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아야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하타가미의 하늘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저 새의 그림자만이 울음소리도 없이 시야 가장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벼락처럼, 끌어들이는 요소와 응하는 요소가 우연히 맞닥뜨려서 살인이 일어나는 거겠죠. 약간의 불운이 살의를 살인으로 바꾸는 거예요.”
이 불운의 시초는 뭐였을까.
--- p.419

아버지가 한 일. 누나가 한 일. 나와 기에가 한 일. 하지 않은 일. 15년 전 그날, 어린 유미가 아빠에게 베푼 다정한 마음씨. 꺼져버린 목숨.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후회. 그걸 전부 보고 있는 존재가 어딘가에 있을까.
“같은 꽃인데 키우는 곳마다 키가 다른 게 신기해서 고모한테 물어봤었지.” 분명 아야네의 말대로일 것이다.
“그랬더니 해님을 보면 쑥쑥 클 거라고 가르쳐줬어.”
이 세상에는 어떤 신도 없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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