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적 용도로 남용했기 때문이다. 권한남용의 배경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로 비판되는 우리 헌법의 권력구조”를 꼽았다. … 퇴진행동이 작성해 집회에서 외쳐진 적폐청산은 사람이든 정책이든 철저하게 박근혜 개인에게만 맞춰져 있었다.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한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 대통령 권력 남용의 원인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한 한계는 다음 정부에서 나타났다.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는 “예산과 인력의 규모는 물론, 영향력 등 눈에 보이는 측면에서 분명 전보다 더 강한 청와대”가 되었다. 국정농단의 원인이 된 대통령의 과도한 권력이 축소되기는커녕 도리어 커진 것이다. 더군다나 진영 청산론으로 편향된 적폐청산 사업은 극단적 진영 갈등으로 번졌다.
---「1장. 촛불에서 드러난 불길한 징조」중에서
21세기의 한국 정치인들은 여전히 이승만이 했던 말처럼, 대중이 원하는 걸 실현하는 게 국민 주권의 원리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진보 또는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집단이 더욱 그렇다. 또한 이들은 이승만처럼 민주주의와 여론을 명분으로 정적을 ‘청산’하려 한다. 미디어 활용도 그때와 비슷하다. 미디어는 합리적 토론이 아니라 대중을 흥분시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광우병 괴담,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7시간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이승만을 증오하는 민주화 세력이 의외로 이승만과 닮았다.
---「2장. 대통령 잔혹사」중에서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까지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은 여전했다. 금권도 여전했다. 재벌의 경제적 독점력을 이용한 지대 추구와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는 오히려 그 규모가 커졌다. 도시 상위 소득 계층이 새롭게 지대 동맹에 참여한 것은 큰 변화였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정규직, 수도권 아파트 소유자 등 소득과 자산의 상위에 속한 사람들이 공고한 계층 간 벽을 쌓았다. 중위 임금의 상승 속도를 크게 웃도는 수도권 아파트 가격 상승도 엄청난 지대를 창출했다. 일자리와 부동산은 21세기 엘리트 동맹에 진입하는 새로운 열쇠이다.…한국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것은 이런 엘리트의 지대 동맹을 이완하고 해체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탓이다.
---「2장. 대통령 잔혹사」중에서
역설적이게도 문재인 정부 임기 전체의 최저임금 인상률은 평균 7.3%였다. 박근혜 시기의 7.4%보다 오히려 낮았다. … 최저임금 인상률은 딱 최저임금에 대한 여론의 긍정과 부정 차이에 비례해 인상됐다. 최저임금 결정 과정은 문재인 정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여론이 곧 민주주의이며, 여론이 과학적 진리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 말이다.
---「3장. 경제학에 반대하는 정치」중에서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주택 가격 상승을 투기꾼 탓으로 규정하며, 부동산 적폐 청산을 주장했다. 집 없는 서민의 억울함을 달랜다며 다주택 또는 고가 주택 보유자들에게 징벌적 세금도 매겼다. … 정부 부동산 정책은 수요 규제가 핵심이었다. 주택 관련 대출을 규제했고, 세금도 높였다. 심지어 투기 대상이 된다며 재개발까지 규제했다. 투기꾼 탓이니 투기꾼이 움직이는 모든 곳에 덫(핀셋 규제)을 설치하면 된다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대출을 규제하자 새로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부터 살던 아파트를 팔고 새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려는 사람까지, 모두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조건에서 대출 규제는 대출 불평등이라는 역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에 죄악세를 매긴 정책도 부정적이었다. … 결국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4년 동안 세율을 올렸다 내렸다, 범위를 넓혔다 좁혔다 하면서 누더기 정책을 만들었다.
---「3장. 경제학에 반대하는 정치」중에서
분단체제론은 식민지 시대를 재해석해 분노감정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과거에서 얻어야 할 교훈에 대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도록 만든다. 비이성적 분노는 정치적으로도 악용된다. 이런 점에서 상대 진영에 대한 무기로 이용되는 민주주의는 과거사에 복수하는 역사관과 궁합이 잘 맞는다.
---「4장. 역사에 복수하는 정치」중에서
이탈리아 정치는 여러모로 한국에 반면교사다. 먼저 한국의 대통령 탄핵과 적폐청산은 이탈리아의 깨끗한 손 운동처럼 사법기관에 의한 대대적 정치인 숙청으로 이어졌다. 대중이 정부 개혁이 아니라 적폐를 청산하는 사법기관에 열광한 점도 비슷했다. 직접 민주주의가 강조되며 여론에 따라 좌우되는 정책이 만연하고, 미디어 정치가 크게 확대된 것도 한국과 이탈리아가 공유하는 점이다. 경제성장률이 하락하는 가운데 정부 부채비율이 급증한 현상도 닮았다. 여론이 지배하는 정부는 고통이 수반되는 경제개혁과 재정개혁에 힘을 집중할 수 없다. 포퓰리즘 정치의 영향을 받은 사회 현상도 비슷한 구석이 많다. 포퓰리즘 정치는 기본적으로 진영을 나누어 적대적 대결을 부추긴다. 남녀, 세대, 지역, 인종 등의 갈등이 폭발한다. 199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베를루스코니의 등장을 계기로 정치인들의 각종 혐오 발언이 쏟아졌다. 2020년대 한국 사회에서 펼쳐지는 페미니즘, 세대 간 공정성, 난민 혐오 등의 논란은 마치 당시 이탈리아 사회를 한반도에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5장.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나라들」중에서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이 민주주의 타락을 막는 마술봉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껏 살펴봤듯, 대통령이 변하지 않으면 개혁의 물꼬를 틀 수가 없다. 여론의 지배와 지대 동맹의 중심에 있는 대통령이 먼저 변해야 저성장 불평등 시대의 민주주의, 동아시아 안보위기 시대의 민주주의도 가능하다. 대통령제 개혁을 국민이 앞장서면 탄핵 촛불처럼 되고, 국회가 앞장서면 1940~1950년대처럼 대통령과 국회가 극한 대결을 벌이게 된다. 새 대통령이 나설 수밖에 없다. 레임덕이 발생하기 전에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하려는 대통령보다, 제왕적 권력을 내려놓는 대통령이 한국 정부의 발전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6장. 결론-민주주의 구하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