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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가와 최고의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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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가와 최고의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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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 예정일 미정
쪽수, 무게, 크기 292쪽 | 546g | 153*224*20mm
ISBN13 9788996121008
ISBN10 8996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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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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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이선희
숙명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자연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음악』『그들은 꿈이 있었다』『아이들이 묻고 노벨상 수상자들이 답한다』(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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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1. 초대 로스차일드, 마이어 암셸

18세기 중반, 프랑크푸르트를 덮친 전염병으로 연이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마이어 암쉘은 열두살이었다. 소박한 장사꾼으로 가끔은 환전업도 해왔던 아버지 암셸 모세는 아들을 랍비로 키우고 싶어했으나 졸지에 가장이 된 마이어 암셸은 후견인에 의해 하노버에 있는 대형 점포인 오펜하임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마이어 암셸은 고전(古錢) 화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화폐 연구에 몰두하면서 급속도로 지식을 습득해 화폐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p. 15

하노버에서 진문 지식을 습득한 마이어 암셸은 성년이 되자 고향 푸랑크푸르트로 돌아와 남동생 칼만과 함께 부친이 남겨준 유산을 발판으로 화폐 사업을 시작한다. 그는 열정적인 화폐 수집가로 알려진 헤센-카셀의 왕자인 빌헬름에게 희귀 화폐를 팔게 된 것을 계기로 헤센-하나우 제후의 궁정 상인이 된다. 청년에게 이런 직책과 그에 연결된 귀족들과의 관계는 장차 실업계로 진입할 수 있는 중요한 첫걸음을 의미하게 된다. --- pp 22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자유로운 직업 선택권이 없었다. 귀족과 기독교도들이 하지 않는 일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마이어 암셸은 26세에 열 살 아래인 구틀레 슈나퍼와 결혼한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궁정 상인으로, 마이어 암셸은 아내의 지참금과 함께 장인의 고객들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p. 24

구틀레와 마이어 암셸은 다섯명의 아들과 다섯명의 딸을 낳았다. 유대인은 13세가 되면 종교적으로는 성인으로, 사회적으로는 남자로 인정을 받았다. 다섯명의 아들들은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종교 교육을 받았지만 아버지 마이어 암셸은 자식들을 자신과 대등한 사업 파트너이자 후계자로 가르쳤다. 아들들의 결혼 뿐만 아니라 딸들의 결혼도 언제나 유리한 사업, 재정적 관계를 고려해서 가능한 한 같은 부류끼리 결합시켰다. 딸들이 결혼할 때는 엄청난 지참금을 주었지만 사위들은 직접적으로 그의 사업에 참여시키기 않았다. ---p. 32-33

마이어 암쉘은 아들들에게 일찍부터 자립성과 막대한 자본을 제공해 주었고, 1810년 다섯 아들을 파트너로 하는 정관을 만들어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와 아들들'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p. 34

1812년 가문의 시조인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다.
‘내가 지시하노라. 내 딸과 사위, 외손자들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와 아들들' 회사에서 진행되는 사업에 결코 참여하지 않기를 바라며, 어떤 사업 기반을 위해서도 자금을 요구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내 아들들에게 계획한 사업의 권한과 소유권을 주어야 한다. 내 딸과 그 상속인들은 언급한 사업에 대해 요구할 권리가 없다. 아버지인 내 뜻을 거스르고 내 아들들이 충분한 소유를 하는 데 방해하는, 그러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p. 35-36

오늘날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紋章)에 새겨진 '콘코르디아 concordia', 즉 일치 단결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아들들에게 그 원칙을 결코 잊지 못하도록 각인시킨 가장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2. 다섯 형제들, 금융 제국의 기초를 닦다
맏아들인 암셸 마이어를 시작으로 잘로몬, 나탄, 칼만, 제임스 다섯 형제는 유럽 각지에 사업 기반을 마련했다. 푸랑크푸르트 본거지는 암쉘이, 그리고 각각 런던과 비인, 파리, 나폴리에 정착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 정신인 '형제애'라는 슬로건과 더불어 동포애 이념은 유럽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최후에 워털루에서 패배하기 까지 무수한 전쟁들로 점철된 현실은 다른 모습을 띄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시기에 다섯 형제들은 국가를 상대로 하는 금융 거래로 막대한 이익을 얻음을 물론 엄청난 정치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런 거래들은 그들에게 위험이 되기도 하고 이익이 되기도 했는데, 오늘날 로스차일드 일가의 탁월한 성공은 형제들의 일치단결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pp 36

1825년, 영국에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로스차일드 일가는 영국 정부의 지급 불가를 피하기 위해 유럽의 금을 모두 사들임으로서 영국 은행을 구한 일은 괄목할 만한 업적이자 이것을 시작으로 금융의 국제 협조가 시작되었고, 이 일은 장차 각국 중앙은행이 협조하는 금본위제를 떠받치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섯 형제들은 유럽 각국에서 국제 금융의 전문가로 정재계에 지도적 위치를 획득한다. ---p. 46

사람들은 즐겨 그들을 '왕들에 군림하는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이 일가는 유대인 공동체의 모범이자 대변인이었고 지주로 봉사했다. 유대인들은 때로는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을 자신들의 것처럼 자만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기독교도들의 시기심을 더욱 부추겼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은 기대와 소망, 비전을 마련해주는 기회의 장이었던 것이다. ---p. 56

3. 권력의 정점에서
형제들이 유럽 각지에 거점을 두고 황제보다 더 빠르다는 정보망과 우편 시스템 등 일찍부터 발전시킨 역동적인 사업 방식은 로스차일드 일가의 특징으로 그들의 국제적인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가속화되는 산업화와 더불어 19세기에는 사람과 운송 수단들의 움직임이 점점 더 속도를 내게 되었다. ---p. 78

3남인 잘로몬은 형제 중에 가장 먼저 철도 열병에 걸리게 되었다. 비록 자신은 살아있는 동안 기차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1830년 모라비아와 갈라시아 등 소금과 철, 석탄의 채굴지에서 비인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에 관심을 가졌다. ---p. 79

1840년대 말 로스차일드 일가는 유럽 국가, 왕가, 제후 등에 최대의 자금 제공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철도 사업에도 최대 출자자로 참여해 그것을 건설하고 경영까지 맡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종종 '철도의 실세'라고 불렀다. ---p. 81

로스차일드 사람들은 내심으로는 사교 활동을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엘리트를 대표하는 데 어울리는 자세를 갖추기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고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다. 그 사치는 왕가조차도 따라올 수 없었으며, 정선된 예술 작품과 희귀한 골동품들로 꾸며진 '로스차일드 양식'이라는 아주 독특한 실내 장식으로 방문객들을 매혹시켰다. ---p. 83


4. 전쟁, 위기, 대재앙
전 유럽이 그랬듯이 로스차일드 일가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때까지 그들은 각국에 재정 지원을 약속하거나 거절함으로써 나름대로 정치 권력을 행사했으나 그 힘이 점점 약해졌다. 어머니 구틀레는 예전에 자신만만하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자식들이 돈을 내놓지 않는다면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p. 104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공포 지배가 시작되었을 때, 반유대주의 선동의 공격 목표였던 로스차일드 일가는 나치 정권의 최대 공격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는 악의적이면서도 선동적인 의도로 이 유대인 가문의 현상을 파헤친 특별 영화들까지 만들어졋다. 그런 영화가 최초로 발표된 것은 1936년에 나온 '로스차일드가 워털루에서 승리하다'였다. ---p. 111

5. 오늘날의 로스차일드가 사람들
가문의 창시자인 마이어 암쉘의 시대부터 로스차일드 가족에게는 자선 행위가 전통적으로 큰 역할을 차지했고, 그런 까닭에 식구들은 자선을 유대교의 십계명 다음으로 중요한 계명으로 여겼다. 가문의 후손들은 부모가 계획했던 것을 대물림한다는 취지로 이를 실행하거나 아니면 고안해 내야할 정도로 자선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p. 120

로스차일드가는 전 세계의 유대인 동족을 위해 노력하고 박해를 받고 떠돌아다니는 유대인에게 고향을 만들어주려는 시온주의 운동에 앞장섰다. 그들의 고향으로 최적의 장소는 성서의 유래지인 팔레스타인이었다. ---p. 122

제 2부 로스차일드가와 최고의 와인
1. 보르도 - 와인의 왕국


와인의 세계에서는 제품의 장점, 맛의 깊이, 비밀스러운 잠재력을 판정하는 키워드로 오래 전부터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테루아르(토양)라는 개념이다. 결국 그것이 어떤 지역에서는 우수한 와인이 나오는데 그와 차이가 거의 없어보이는 다른 지역에서는 왜 그렇지 못한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론 테루아르를 중심으로 한 자연 요인과 품종 배합 비율만이 포도 재배를 좌우하는 핵심 요인은 아니다. 측량 가능한 생태계 외에도 다른 차원, 즉 기쁨과 고통, 긍지, 땀의 결정, 그리고 오랜 역사의 변동 등을 포함한 정신적 관점도 포도 재배에 있어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곧 포도 재배에는 기후 조건과 산지의 요인 뿐만 아니라 위기, 도약, 희망 그리고 보르도 포도 재배의 오랜 역사 속의 꿈과 실망 등이 점철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로스차일드의 샤토 무통과 샤토 라피트의 성공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p. 138

2. 샤토 무통과 샤토 라피트
1853년 로스차일드 일가의 영국 분가가 샤토 무통을 매입하고, 15년 뒤 프랑스 분가가 샤토 라피트를 매입하던 시기, 보르도 와인은 예상 외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 시절은 틀림없이 보르도 와인의 황금시대였다. ---p. 142

너대니얼 로스차일드는 런던의 금융왕 나탄의 3남으로 1812년에 태어났다. 그는 영국 분가의 일원이었으나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너대니얼은 프랑스에 살면서 망명지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앗을 것이며, 또 막강한 숙부 옆에서 늘 긴장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너대니얼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포도원 샤토 무통을 구입하게끔 했는지도 모른다. 1853년 파리의 은행가 이사크 투리에에게 포도원을 구입했?. 그는 숙부이자 장인인 제임스가 인접한 샤토 라피트를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실은 안 너대니얼은 일부러 장인을 따돌리고 장인이 막연히 꿈꾸기만 했던 것을 성공적으로 실현했다. ---p. 166

3. 손님들을 위한 특별한 것
‘나는 일등은 할 수 없고 이등은 원하지 않는다. 나는 무통이다.’
1855년은 보르도 와인 역사상 가장 의미깊은 해이다. 그 해 프랑스는 온통 파리에서 열릴 대규모 세계 박람회로 들떠있었다. 역사상 두 번째 열리는 박람회로, 프랑스는 국위를 선양하고 자국의 제품을 세계에 소개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유명한 보르도 와인을 소개하는 데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프랑스 정부는 특히 나폴레옹 3세의 지시에 따라 오래 전부터 미뤄왔던 조치를 처리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바로 보르도 산 유명 와인에 등급을 매기는 작업으로, 이로 인해 향후 백 년의 평가가 결정되고 말았다. 포도원을 매입한 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너대니얼로서는 샤토 무통을 프르미에 크뤼 등급에 오르게 하는 데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p. 167

4. 경쟁사의 달콤한 향기
제임스 드 로스차일드 남작은 일찍부터 메독산 레드와인에 특별한 애정을 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최고의 와인이라고 하는 샤토 라피트를 각별히 사랑했다. 신기하게도 그 이름은 그의 은행이 파리의 라피트가를 연상시켰다. 언젠가 이 포도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확신한 그는 꾸준히 샤토 라피트의 와인을 마셨다. ---p. 182

1868년 샤토 라피트가 매물로 나와잇다는 것이 알려지자 보르도는 물론 프랑스 전역의 와인 업계가 주목했다. 그러나 이 포도원은 결국 메독의 ‘왕관없는 왕’에게 돌아갔다. 포도원의 명예로운 이름, 포도나무의 거대한 잠재력과 토양, 관리인 에밀 구달의 전설적인 명성 등 뿐만 아니라 통 속에서 숙성된 보물들, 이런 것들이 구매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라피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단순히 포도원의 매각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화가 경매에 나왔다는 것을 누구나 분명하게 인식했다. 경매 날짜는 1868년 7월 12일로 결정되었고 프랑스 전체가 이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p. 183

5. 나는 무통이다 - 필립 드 로스차일드
“와인은 여자와 같다. 변덕스럽고 수줍어하며 만족을 얻기가 어렵다. 뚜껑을 열었을 때, 행여 낙심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좋은 것을 만났을 때, 그건 대개는 훌륭하게 재배되었을 때 그렇게 되지만,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필리프 드 로스차일드

1922년 10월 22일 아침, 필리프 드 로스차일드가 포이악에 도착했을 때, 갓 스무 살이 된 이 청년이 그 후 수 십년 동안 포도원의 운명을 손에 쥐고 샤토 무통을 예상치 못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수를 마친 뒤의 아름답고 화창한 가을날, 필리프는 도착하자마자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햇다. 마당 중앙에 작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몇몇 종업원이 당황해서 불 옆에 서있었다. 샤토 무통의 새 주인은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면서 회계 장부가 불꽃 속에서 이제 막 타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p. 207

“그러니까 이제까지 와인 평이 안좋았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와인을 보르도로 보냈단 말인가? 와인 상인들의 헛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맛있는 액즙을 보호해야 할 시간에, 3년 동안 와인은 낯선 환경에서 익는다. 우리의 상표를 붙인 저 병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인가? 무거운 통 속에서 보르도로 덜커덩거리며 가는 와인은 분명 우리 것인데, 상표가 붙은 후에도 계속 그러한지 확실히 알고 싶다. 왜 나는 내 이름을 병에 붙이면 안된단 말인가? 그것은 정말로 새로운 일이겠지만 - 지금까지 아무도 병에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 나, 필리프는 내 와인이 최고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p. 211

6. 괴링을 위한 와인
아돌프 히틀러는 금욕주의자였으나 많은 나치 간부들은 와인 애호가일 뿐만 아니라 포도 재배와 와인 장사에도 깊숙이 관련되어 있었다. 괴링과 마찬가지로 괴벨스도 탁월한 와인 애호가로 이름이 나 있었다. 두 사람은 정치적인 면 뿐만 아니라 와인 취향도 서로 달라서, 제국의 선전상 괴벨스가 부르고뉴산을 좋아한 반면 헤르만 괴링은 보르도산 그랑 크뤼를 선호했다. 괴링은 특히 샤토 라피트를 편애했고 샤토 무통도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p. 238

“당신께서 이곳을 떠나신 후에 벽돌공을 불러다가 이 벽을 만들게 했습니다. 주인님, 당신의 최고급 와인은 이 벽 뒤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괴링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고 알베르 블롱댕이 설명했다. ---p. 243

7. 전후의 시대
전쟁이 끝난 바로 그해에 오늘날 샤토 소유주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떨치게 된 와인이 포이악의 포도밭에서 만들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45년산 샤토 무통 로칠드는 빼어나게 탁월한 와인으로, 60년도 더 지난 오늘까지도 와인 마니아들은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것이야말로 세기의 와인이다’라고 토로한다. ---p. 246

필리프는 옛날에 단념했던 아이디어에 다시 착수했다. 1920년대에 박수갈채와 동시에 맹렬한 반발을 샀던 그 아이디어, 즉 병에 예술 상표를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방법을 달리 했다. 각 연도의 일회성을 강조하기 위해 해마다 새로운 예술작품으로 와인병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시도에서 필립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폭탄처럼 히트칠 것으로 확신했다. ---p. 249

저 유명한 1945년도산 상표를 디자인한 삽화가 필리프 쥘리앙을 시작으로 장 콕토, 살바도르 달리, 바실리 칸딘스키, 조르주 브라크, 앙드레 마송,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니키 드 생팔,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 현대예술을 대표하는 쟁쟁한 개척자들이 무통의 병을 장식해 주었다. 폴란드계 프랑스인 화가 발타사르 클로소프스키 드 롤라는 1933년도산 무통에 약간의 스캔들을 일으켰다. ---p. 250

“오른편에는 서른 살이 된 용감한 엘리가 있고 왼편에는 마흔 다섯 살의 호전적인 필리프가 있다. 둘은 매우 빈틈이 없는 자들이고 로스차일드 일가의 사람들이다. 즉 누군가의 명령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며, 각자 자신이 1등이라고 확신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무통의 탑에서 라피트를 내려다 볼 수 있다. 갈등의 기미가 보인다.”
필립은 이때는 아직 이 갈등이 얼마나 심각해질지 예상하지 못했으나... ---p. 256

1961년 3월 4일 열린 필리프의 딸 필리핀느와 영화배우 자크 세레의 결혼식은 짧은 평화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이 결혼식은 샤토 무통과 샤토 라피트 양가 모두에게 경사였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방 샤토의 와인을 가져다가 연회의 메인 이벤트에 사용했다. 이는 여전히 분노의 투쟁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라이벌을 향한 제스처였다. ---p. 260

8.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필리프와 폴린은 산타 바바라로 두 사람만의 마지막 여행을 했고, 폴린은 1976년 5월 8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샤토 무통에 묻혔다. 필리프는 그와 마찬가지로 포도원에 모든 것을 걸엇던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다. ---p. 265

에릭 남작이 보여준 또 다른 빛나는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1987년에 스페인의 스타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에게 의뢰해 만든 와인 저장고일 것이다. 포도밭 지하에서 2년간 와인을 원형으로 보관할 수 있게 만든 이 와인 저장고는 동시대 창고 건축의 정점으로 평가되고, 샤토 무통만 놀라운 연출을 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p. 266

한편으로는 공포의 날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승리의 날이었다.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1976년 5월 24일,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날이다. 그날 영국의 와인상 스티븐 스퍼리어 주최로 파리에서는 세계의 와인 왕관 쟁탈전이 열렸는데, 그 결과 구세계와 신세계의 역학관계가 역전되고 말았다. 자웅을 겨루기 위해 미국산과 프랑스산 최고급 와인을 엄선해 상표를 가린채 블라인드 테스팅으로 9명의 공정한 심사위원들이 평가를 진행했다. ---p. 271

로버트 몬다비는 캘리포니아 포도 재배의 개척자 증 한 사람이었다. 1913년 이탈리아 이민의 자식으로 미네소타 주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와인과 친숙한 본성을 타고났다. 이탈리아 변경 출신인 그의 부모는 미국에 이주하기 전부터 포도 농가에서 일했으며 신천지에서도 와인상으로서 성공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1923년 몬다비 일가는 캘리포니아의 로디로 이사했고 거기서 과거의 생업이었던 포도 재배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p. 274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1970년,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 와인 전시회가 열렸을 때이다. 아마도 몬다비의 와인이 남작의 까다로운 입맛에 깊은 인상을 주엇던 것 같다. 그날 저녁 필리프가 지배인을 시켜서 전화를 걸어 캘리포니아 출신의 자수성가한 남자에게 대화를 청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유쾌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고, 대화 사이에 함께 와인을 생산할 가능성을 논의햇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정말이지 혁명과도 같은 아이디어였다. ---p. 276

문제는 신제품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었다. 난항을 거듭한 끝에 ‘얼라이언스’라는 명칭이 후보로 올라왔다. 이 단어가 두 개의 대 와이너리의 공동 작업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1777년 라파이에트 후작이 포이악을 출항해 바다를 건너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했는데, 이 때의 프랑스 참전이 불미 동맹의 시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결국 신구 양 세계의 차이보다는 이 합작 투자의 공통성, 독자성, 혁신성을 강조하는 ‘오푸스 원’이라는 명칭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p. 277

1990년 이래로 회사는 ‘바롱 필리프 드 로칠드’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1997년 한걸음 더 진전해 칠레의 명문 포도 재배 농가 ‘비냐 콘차 이 토로’와 합작 투자 계획을 체결했다. 이로써 1998년 이후로 남미에서 최고급 와인 중 하나로 꼽히는 ‘알마비바’를 출시했다. 오푸스 원과 마찬가지로 알마비바도 숙성 방법과 스타일에서 위대한 보르도 와인을 모범으로 삼되 칠레의 토착성도 잃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p. 281

이 위대한 가문의 역사가 늘 시사하듯 남작의 딸에게도 성공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가족이 일치단결해서 각자 맡은 바 열정을 다해 사업에 매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필리핀느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가문에 의지하지 않고 성공하는 가문이 없다.” ---p. 282

에필로그
샤토 라피트와 샤토 무통이 와인의 세계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단지 이 두 샤토가 프리미어 크뤼의 지위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두 샤토의 성공 비밀은 실로 놀랍게도 백 년 이상 그들의 와인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뿐만 아니라 소유주위 연속성에도 기초한다. 1855년에 등급 분류를 했던 66개의 포도원 중에 지금도 소유자가 바뀌지 않은 것은 샤토 랑고아 바르통과 샤토 무통 로칠드 두 곳뿐이다. 1868년 이래 로스차일드가의 소유가 된 샤토 라피트도 거의 비슷한 기간 동안 한 가문이 소유했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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