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얼마만큼 사랑해?”
어머니도 가끔 그렇게 물으셨다.
그때마다 나는 으레 두 손을 활짝 펴 보이고
“하늘, 땅만큼, 모래알만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혼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정말 이 세상의 모래알들은 얼마나 많을까.
아무리 세도 다 셀 수 없는 모래들,
……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랑까지도
숫자로 나타내려고 애쓴다.
그래야 세상은 마음을 놓는다.
--- p.15~16
남자들이 여성에게 끌려서 가는 그 길. 사랑의 길. 그건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이걸 숫자로 셀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순간 시장에서 쓰는 화폐가 별 의미가 없어져요.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거 있죠? 사랑보다도 돈 때문에 움직이는 것. 이것은 위험한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숫자의 세계와 언어의 세계 가운데, 사랑은 언어로 숫자가 아닌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숫자로 표현되지요. GNP나 서열, 돈의 액수. 하지만 모든 것이 이렇게 숫자로 표현될수록 우리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사랑이나 마음이나 정의 같은 것의 귀중함을 더 깨닫게 됩니다. 참 역설적이지요.
--- p.60
컴퓨터는 1과 0으로 모든 걸 기록할 수 있습니다. 바로 디지털문화이고 음양사상입니다. 디지털의 원(One)과 제로, 즉 피타고라스가 얘기하는 2개의 대립하는 짝으로 보면 세상이 확연해집니다. 유한과 무한, 단수와 복수, 기수와 우수, 우와 좌, 정과 동, 직선과 곡선 등등 이 세상이 복잡하게 많은 것 같아도 정리가 되어 질서정연한 하나의 우주를 생각할 수 있지요. 삼라만상 무한한 우주를 음과 양으로 나누면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둘이라는 숫자가 없었으면 부부, 남녀, 빛과 어둠 등을 의식할 수 없었겠죠. 우리 머리 자체가 이미 디지털화되어 있는 겁니다.
--- p.178~179
이렇게 보면, 인문학이라는 것은 마술입니다. 시 마술이고, 문학 마술입니다. 과학이 아닌 것이 마술인데, 과학을 상징하는 숫자에 신비가 있어요. 문명의 극단에 와 있는 21세기는 숫자와 언어의 세계로 끝없이 분할된, 갈가리 찢어진 산업주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것을 다시 통합하려는 마술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 p.191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스토리로 상상하고, 스토리로 생각하면 훨씬 절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사람에게는 피가 뚝뚝 흘리는 삶의 철학, 삶의 시가 다가옵니다. 그것은 아인슈타인도 나에게 말하지 못하는 겁니다. 사랑에 애인을 잃고, 고민하고 밤을 새우는 사람에게 상대성 원리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요. 결국 ‘8020 이어령 명강-생각의 축제’는 숫자(8020)와 고유명사(이어령), 보통명사(명강)가 혼합된, 숫자와 언어의 세계, 숫자의 삶과 언어의 사랑이 살아 숨 쉬는 ‘생각의 축제’입니다.
--- p.221
속일 때 속이더라도 말(곡식, 액체, 가루 따위의 분량을 되는 데 쓰는 그릇)과 되(사각형 모양의 나무그릇)에 수북하게 쌓아주는 한국 시장의 훈훈한 풍경이 새삼 그리워지더군요. 정확한 도량형을 만들어놓고도 실제로 줄 때는 부정확하게 수북하게 쌓아 주는 민족은 아마 한국 말고는 없을 겁니다. 근대화하여 정찰제나 엄격하게 도량형을 따지는 오늘날에도 시장에서 되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래요. 옛날같이 수북한 봉우리가 아니라 수평으로 깎아도 마지막까지 싹 훑지 않고 한 뼘 정도는 남기는 그 정서의 그리움이라고나 할까요. 야박하게 끝까지 싹 쓸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한국인의 계산법인 까닭이겠지요.
--- p.236
오늘의 젊은 벗들에게 창조력과 상상력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다른 생각, 다른 삶’을 선택한 젊은이들이 창조력과 상상력을 이해한다면, ‘악마의 숫자든 뭐든 오너라. 인생이 숫자 아니면 이름으로 시작된다고? 어느 것이든 좋다. 숫자든 이름이든 인생의 운명이여 오라. 나는 나의 인생을 나의 창조적 상상력으로 행복하게 만들겠다. 숫자도 만들겠다. 숫자와 함께 수많은 아름다운 이름과 시 또한 발견하겠다”고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젊은이들에 의지하여 우리의 미래는 새로운 도전 앞에 머뭇거리지 않는 용기와 열정으로 활짝 열릴 것입니다.
---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