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 표지의 ‘10대 새김글’ 관련 쪽
- 수는 꽃이며 이름이다(29쪽)- 수식은 언어이다(45쪽)
- 수학은 게임이다(146쪽)- 공리와 정의는 약속이며 규칙이다(155쪽)
- 함수는 영화이다(245쪽)- 학문에 왕도는 없되 정도는 있다(845쪽)
-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771쪽)- 존재는 모순 속에 피는 꽃(794쪽)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21쪽)- 진취적 기상을 갖자(876쪽)
이 ‘10대 새김글’은 가장 핵심적으로 새겨둘 만한 구절들이다. 이를 처음 대할 때는 좀 추상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가면서 수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뼈에 닿도록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나아가 바로 이런 측면이야말로 수학이 단순한 ‘숫자 놀이’, ‘수식 다루기’, ‘문제풀이’ 등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가장 심오한 지적 활동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하여 수학을 배워 가는 동안 자주 돌이켜보고 되풀이해서 음미할 필요가 있다.
- (39쪽)유리수의 경우 어떤 수에 대한 다음 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수의 신비 중 하나이다. 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수를 점에 대응시킨 것, 즉 수직선을 생각해보자. 수직선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작은 수로부터 큰 수의 순서로 모든 유리수가 늘어서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상황을 운동장에 키 순서로 늘어선 학생들에 비유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이 비유에는 커다란 맹점이 있다. 학생들의 줄에서는 어떤 학생에 대한 ‘다음 학생’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일상 경험상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신비롭게도 유리수의 경우 분명히 크기 순으로 늘어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수에 대한 다음 수를 딱 꼬집어낼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현실적인 일상 경험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므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수직선의 정체는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수직선의 궁극적인 본 모습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므로 오직 논리적 추리를 통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다. 언뜻 아주 단순한 것으로 여겼던 수직선이란 개념에 이토록 난해한 현상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그런데 수직선의 신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으며, 실수에는 더욱 놀라운 현상이 담겨져 있다.
- (84쪽)소수에 관하여 살펴본 이상의 내용을 화학에 비유하여 “소수는 원소, 합성수는 분자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면 편하다. 특히 유의할 것은 ‘1’은 소수에 넣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아래에 쓴 것과 같은 이유가 있다. 반대로 1은 또한 합성수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은 자명하다. 1, 2, 3, …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자연수 가운데 소수도 합성수도 아닌 수는 1 하나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은 자연수체계에 있어서 소수보다 더 근본적인 요소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격의 독보적 존재이다. 대개의 교재들은 자연수에서 1을 별도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와 같은 1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따로 분류했다. 1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볼 내용이 있는 바, 711쪽에 쓴 「‘1’의 의미를 되새기며」에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 (97쪽)지금껏 이야기한 ‘0의 도입과 정수체계의 완성’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0의 의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0의 의미’는 “자릿수→무→기준”이라는 ‘3대 의미’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0의 3대 의미’를 여러 교재들은 명확히 기술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이해함으로써 ‘정수체계의 완성’에 대하여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기 바란다.
① ‘자릿수’로서의 영: 고대의 바빌로니아, 이집트, 마야 문명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중 최초의 것은 기원전 4~5세기 경 바빌로니아 문명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까지는 ‘동그라미 기호’가 없었으며 각자 다른 기호를 사용했다. 오늘날 쓰이는 10, 100, 1000, …, 0.1, 0.01, 0.001, … 등에서의 0을 가리킨다.
② ‘무’로서의 영: 7세기 경 인도에서 ‘무로서의 영’이란 의미 및 ‘동그라미 기호’가 확립되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졌다. ‘무로서의 영’은 “3-3=0”, “1×0=0”, “1÷0은 정의되지 않은 연산” 등에서의 0을 가리킨다.
③ ‘기준점’으로서의 영: 수직선 위의 ‘기준점으로서의 영’을 말한다. 이 의미는 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널리 인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음수도 공인되어 정수체계가 완성되었다. 섭씨 0도, 화씨 0도, 수직선과 좌표계 원점 등에서의 0을 가리킨다. 적도(위도 0도), 본초자오선(영국 그리니치 천문대(Greenwich observatory)를 지나는 경도 0도의 경선) 등도 이에 해당하지만 이때는 양수- 음수 대신 북위- 남위, 동경- 서경 등의 접두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기준으로서의 영’은 수직선 위에서 다른 모든 수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점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무로서의 영’은 “기준점인 영으로부터의 거리가 영”이라는 뜻이며, ‘거리를 재는 기준점으로서의 영’은 엄연한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하기 바란다.
- (384쪽)무한수열의 덧셈처럼 무한과정을 실제로 달성했다는 가정을 택하는 태도를 가리켜 ‘실무한’을 인정하는 입장이라고 말하며,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가무한’만을 인정한다. 이 2가지의 대립적 관점에 대해서는 집합론을 다룰 때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했다. 거기서 우리는 실무한을 인정하는 칸토어적 관점에 서야 무리수- 초월수- 무한집합 등 현대수학의 초석을 이루는 개념들이 포용될 수 있음을 보았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언뜻 당연하게 또는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여겼던 ‘수직선’과 이것에 대응하는 ‘실수체계’는 논리적으로 볼 때 수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자연수’라는 토대와 ‘완성된 무한과정’이라는 가상적 과정을 결합해서 얻은 ‘가정계’란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자연수체계란 것도 인간적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 ‘가상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 실수체계는 이보다 한 차원 더 깊이 들어간 ‘가상현실 속의 가상현실’이라고 하겠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실수체계의 ‘가정성(假?g)’을 강조한다고 막연한 환상이나 뜬구름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줄이자면 이는 ‘실체적 환상’이다. 우리가 이토록 기묘한 과정을 거쳐서라도 실수체계의 관념을 한사코 정립하려는 이유는 인간이 사는 현실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적용할 ‘필요성’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깊이 새기면서 이제 이산의 세계를 떠나 연속의 세계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수학사상 최대의 업적’으로 꼽는 미적분학이라는 장엄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 (794쪽)과연 가장 단순한 역설은 무엇일까- 그 답으로는 역시 “내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첫째로 꼽힐 듯 싶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무’라는 단 하나의 글자로 표현되는 관념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무는 말 그대로 하자면 ‘아무 것도 없음’이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실체는 없을지라도 ‘무’라는 이름은 있으므로 ‘아무 것도 없음’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무는 가장 단순한 모순이자 역설이다. …… 어쨌든 ‘무에서의 창조’에 따르면 만유는 무에서 탄생했다. 그렇다면 “그 무는 어디에서 왔을까- ”를 생각해보자. 이 무가 ‘다른 유’에서 왔다면 만유는 궁극적으로 다른 ‘유’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므로 ‘다른 유’에서 나왔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만유의 원천인 무는 그 이전의 ‘다른 무’에서 나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논리는 또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결국 무는 ‘그 이전의 무’, 그 이전의 무는 ‘또 그 이전의 무’, 또 그 이전의 무는 … 등으로 ‘무의 무한계열’을 얻게 된다. 만일 ‘처음 출발했던 무’를 0이라 한다면, ‘그 이전의 무’는 -1, ‘또 그 이전의 무’는 -2로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이 무한히 확장되면 ‘음의 무한대’가 나오며, 이를 또 확장하면 ‘음의 무한대의 무한계열’이 얻어지고, 이것은 0을 중심으로 칸토어가 이야기했던 ‘(양의)무한대의 무한계열’과 대칭을 이루게 된다. …… 이상의 내용을 기억하기에 좋은 문구로 요약한다면 “존재는 모순 속에 피는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원은 오직 무밖에 없는 듯 한데, 그 무가 바로 역설이며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더 나아가면 또 다른 수많은 귀결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이 책의 취지를 넘으므로 여기서는 일단 이 정도로 그친다.
- (876쪽)나는 생각건대, 학문의 발전은 미지 영역의 축소가 아니라 오히려 확장으로 본다. 어린애는 질문의 가짓수가 별로 많지 않다. 모르는 것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아는 것이 적기 때문이다(어린애는 호기심도 많고 질문도 많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현상일 뿐 어른의 마음속에 간직된 의문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이 배워갈수록 아는 영역도 넓어지지만, 그에 따라 모르는 영역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반대로 모르는 영역도 따라서 넓어진다. 안다는 것은, 아는 것(답- 지식 등)과 모르는 것(문제- 과제 등)을 동시에 늘려 가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여러분이 앞으로 할 일은 과거보다 더 많이 ‘있을’ 뿐 아니라 더 많이 ‘생성’될 것이다. 이는 무한히 깊은 무의 심연으로부터 무한히 높고도 넓은 초한의 세계까지 샘솟아 나온다는 수학적 결론의 직접적 귀결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와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오직 끊임없는 사랑과 열정으로 대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여러분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간직하기 바란다. 모든 것이 해결된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