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웹툰 속에서나 일어날 일이 봉암여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3반 부반장의 머리가 날아왔고 피바다가 친구들을 공격했고 사방에 피가 고였다. 교내 방송에서는 감염자들을 피해 도망치라고 했다. 감염자들은 피바다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 감염자에게 물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물리지 않고 혜나에게 갈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래도 가야 했다. 풀숲 사이에 쭈그려 앉은 채 한참 동안 심호흡을 했다. --- p.18 「피구왕 재인」 중에서
내 오른손을 두드리고 있는 건 손가락이었다. 팔꿈치 부근에서 뜯겨 나간 팔에 달려 있는 손가락. 톡톡. 손가락이 다시 노크하듯 내 손등을 두드렸다. … 나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축 늘어진 손이 천천히 손바닥을 들어 보인다. 낯선 손이 익숙한 몸짓을 한다. 양옆으로 휘적휘적. 그러다가 힘을 잃고 기울어진다. 나는 그 비언어적 행위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안다. 안녕. 그래 안녕. 근데 누구세요? --- p.73 「좀비즈 어웨이」 중에서
“머리 필요 없어요.” “… 없어요? 사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보고 있었거든요. 시체 뒤지길래 머리가 필요한 거라 생각했는데… 취업 준비 안 해요? 아, 혹시 입시인가? 입시라면 미안해요. 성숙해 보여서….” “저는 필요 없어요.” “… 그럼 팔이라도 줄까요?” --- p.80 「좀비즈 어웨이」 중에서
지금까지 먹었던 그 어떤 약도 참살이404처럼 효과적이진 못했다. 머릿속을 불안과 우울 대신 자신감으로 채워 주지 않았다. 축 늘어진 정신과 육체를 벌떡 일어나게 해 주지 않았다. 참살이404 덕분에 소영은 진정으로 살아 있을 수 있었고,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서 사람 구실을 해낼 수 있었다. 소영은 그의 상사처럼 내용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빈 병을 머리 위로 털었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멘.
〈피구왕 재인〉 봉암여고 체육대회를 앞두고 피구 예선전을 치르던 나는 피구공 대신 날아온 사람 머리를 맞닥뜨린다. 그 직후 감염자들을 피해 도망치라는 교내 방송이 들려오고,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학교 건물 밖으로 몰려나온다. 운동장에 있던 나는 교실에 있을 소중한 친구 혜나를 찾기 위해 홀로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뜯겨 나간 팔다리며 내장, 곳곳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본 나는 영화나 웹툰에서나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깨닫는다. 감염되지 않은 자를 노리는 붉은 눈의 감염자들을 피해, 나는 혜나를 만나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말을 꼭 전해야만 한다.
〈좀비즈 어웨이〉 연정은 정육점 알바생이다. 정육점에서는 좀비 고기와 좀비 머리를 취급한다. 고기를 파는 이유는 좀비를 먹으면 좀비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생긴다는 뜬소문이 퍼져서이고, 머리를 파는 이유는 나라에 머리를 제출할 경우 대입 또는 취업 시 가산점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사장님의 명에 따라 좀비 머리를 찾아 동네를 뒤지던 연정은 좀비가 되지 않았지만 머리만 남은 채로 살아 있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인간다운 생활을 돕는 인프라가 모두 무너져 버린 세상에서 인간다운 연민을 버리지 못한 연정은 여자의 뜬금없는 부탁에 돌연히 긴 여정에 뛰어든다.
〈참살이404〉 소영은 유서를 쓰던 날 이력서도 썼다. 유서에 쓸 만한 문장을 검색하다 회사 광고를 발견한 것이다. 건강식품 제조업체 JBU에 입사한 소영은 회사에서 개발 중인 음료 ‘참살이404’를 마신 뒤 평생 느껴 온 무력감과 피로감에서 처음으로 벗어난다. JBU 회장은 스스로를 패배자, 낙오자, 부적응자라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 참살이404를 만들었다고 밝혔고 JBU의 입사자 또한 그러한 이들이었다. 신규 고객과 직원을 물색하던 소영은 대기업에 다니다 6년여 만에 그만두었다는 고교 동창 보영을 데려오는데, 그는 참살이404를 마시든 그렇지 않든 갖가지 방면에서 유능함을 뽐내며 만족스러웠던 소영의 회사 생활을 뒤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