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고요함이며 고요함은 침묵이다. 침묵은 소음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말의 소리와 메아리에서 들리고 울려 퍼지는 고요함이다. 침묵 없이는 말도 없으며, 말없이는 침묵도 없다. 침묵은 끝없이 후퇴하는 말의 지평이다. 침묵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할 수 있다. 침묵을 듣는다는 것은 침묵을 배반하는 것이다. 듣지 않음으로써 듣는 것이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이며,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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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술을 통해 침묵에 접근하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시각예술을 통해 침묵에 접근할까? 침묵을 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침묵’은 그토록 낯선, 심지어는 불가능한 낱말이다. 이 말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모든 발화에서 자신을 부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침묵’은 자신을 배신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거스르는 동시에 드러낸다. ‘침묵’을 말하는 것은 침묵을 깨는 것이고, 일단 깨진 침묵은 다시금 전체가 될 수 없다. 모호성과 어둠으로 점철된 침묵은 예술을 통해서만 또렷한 모습을 표현하거나 예술로 쪼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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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이라는 말은 라틴어 ‘nausea’(‘뱃멀미’라는 의미이지만, ‘불쾌한 상황’ 혹은 ‘시끄러운 혼란’과 같은 부가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와 그리스어 ‘nausea’(배라는 의미의 ‘naus’에서 왔다)에서 왔고, 도중에 프랑스 고어 ‘noyse’를 거쳤다. 어원만 보더라도 소음은 ‘역겹다’는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미셸 세르는 이렇게 썼다. “… 언어는 시간을 죽이지만, 침묵은 황금 혀보다 더 황금빛이어서 우리의 유일한 진짜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천둥 같은 언어와 감각의 위협으로 굳게 봉인되어 있던 감각에 충격을 주어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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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을 폭포처럼 쏟아내는 경우다. 이 말은 언어 아래 잠겨 있는 언어를 말하며 끝없는 다른 것에 관한 말하기다. 겉으로 보기에는 심오한 대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을 피상적인 혼잣말에 지나지 않는다. … 끊임없는 수다는 사람들이 돌아보는 모든 곳에서 자신들의 말만 ‘듣는’ 자아를 강화하게 만든다. 그러한 세상에서 소음은 사소한 말을 방해하려 위협하는 침묵을 침묵시킨다. 소금쟁이들이 호수 표면을 가로질러 가듯이 ‘수다 떠는 사람들’은 그들이 말을 멈추는 순간 끝도 없는 침묵을 가진 텅 빈 공간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이와 반대로 침묵은 치유가 될 수 있다. 언어 수준이 완전히 저하되고 말이 소음이 될 때 저항을 위한, 그리고 아마도 치료를 위한 최고의 전략은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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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테크놀로지는 오히려 사람들을 분리하고 있다. 세상이 상호 연결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서로를 더 듣지 못하고 있다. 폐쇄된 네트워크, 개인 요구에 맞춘 앱, 개인화된 매체, 소셜미디어는 오히려 반사회적이 되어 간다. 사람들이 말은 하고 있지만 듣는 방법을 잊어가고 있다.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대화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침묵시키려 한다. 의사소통하는 망이 닫히면 정보는 소음이 되고 목소리는 생겨나지만, 그 목소리는 결국 ‘침묵의 소리’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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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 기관인 귀의 복잡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 귀는 이미 두 개라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그뿐 아니라 귀는 육체의 외부와 내부 사이의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내적으로도 경계를 가진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경계 내의 경계, (차이의) 가장자리 내의 가장자리를 만들어낸다. 귀는 두 개지만 하나만 따져 봐도 이미 하나가 아니라 셋, 즉 외이, 중이, 내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 외부와 내부 사이의 단순한 경계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구멍 속 구멍, 가장자리 속 가장자리, 한계 내의 또 한계다. 외부는 실제로 어디서 끝나며 내부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소리는 내부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 있는 것인가? 침묵은 세계에도 없고, 귀에도 없으며, 어딘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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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빠르고 시끄러운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듣는 법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생각 없는 잡담은 마음의 반성을 침묵시킨다. 항상 먼저 말하고 입을 다무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은 회피, 통제, 장악, 지배의 전략이다. 진정으로 경청하기 위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하며, 하이데거의 설명처럼 침묵하려면 겸손함과 과묵함이 필요하다.
--- p.462
돌담은 묵상을 초대하는 공간을 열어준다. 그 공간에 들어가려면 세상의 소음을 내려놓고 침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려놓는 것은 놓아주는 것이며, 역설적이지만 의지를 발휘하지 않을 의지를 필요로 한다. 묵상은 자신만의 이미지로 세상을 형성하기보다는 무한한 삶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열어준다. 이 삶의 선물은 죽음의 선물이기도 하다. 놀라운 사실은 죽음을 받아들이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이다.
--- p.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