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요리하고, 먹고, 부처님에게 꽃을 공양하기 위해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필요가 없다. 독경을 하고, 경전에 담긴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설거지하고 행선을 하는 것과 같이 정토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우리는 당장 할 수 있다. 정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앞에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우리가 정토 앞에 있는가?' 하는 것뿐이다.
승가에서 항아리를 씻고, 차를 끓이고, 목욕하거나 정원을 가꿀 때마다 우리가 하는 낱낱의 행동과 걸음걸이는 하나의 설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한 걸음만으로도 설법이 될 수 있다. 차를 마시기 위해 당당하고 거침없이, 그리고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올리는 것도 설법이 될 수 있다. 먹을 때 행복, 평화 그리고 기쁨을 얻는 방식으로 식사를 하는 것은 식사에 관한 설법이 된다.
우리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정토에 사는 보살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오늘 당장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루 동안 이렇게 할 수 있으면, 그것은 정토에서 보낸 하루가 되리라.
--- p.131
보통 수행을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우리의 욕망과 숭배의 대상이 자기 바깥에 있기 마련이다.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정토 또는 하느님의 나라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숭배의 대상이 자신의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수행의 초기 단계에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에 아무 진정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고통, 무너지고 사라지기 마련인 것, 그리고 커다란 슬픔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장소와 미래에 속하는 그 무엇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 정토, 열반 또는 어느 보살의 처소에 있는 것일 리는 없다. 인간의 심리란 그런 법이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신의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게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바깥에 있는 모든 것 역시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 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