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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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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5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572쪽 | 630g | 142*210*32mm
ISBN13 9791159318399
ISBN10 1159318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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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알고 싶을 땐 창문이 몇 개 있는 집에서 자랐는지 묻는 게 제일 효율적이다. 뭘 먹고 뭘 입고 자랐는지는 믿을 만한 기준이 못 된다. 가난의 척도로는 창문 개수만 한 것이 없다. 그렇다, 가난은 창문의 수. 창문이 없거나 적으면 적을수록 더 가난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 p.9

걷어둔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인 여느 때의 좁고 어두운 방이 아버지가 없는 것만으로 완전히 달라 보였다. 나는 숨죽이고 방 한복판까지 걸어갔다. 소리를 내보았다. 처음에는 목 상태를 점검하는 것처럼 작은 소리를, 다음에는 큰맘 먹고 아무 말이나 배 속부터 내보았다. 아무도 없다.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이번에는 몸을 움직여보았다. 되는 대로 팔다리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속에서 힘이 솟구치는 듯했다. 텔레비전 위에 쌓인 먼지, 개수대에 처박힌 더러운 식기, 스티커가 붙은 찬장 문, 마키코와 내 키를 새긴 기둥의 나뭇결. 눈에 익은 그것들이 마법의 가루라도 뿌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 p.17

그러니까 태어난 이상은, 살아서, 계속 밥 먹고, 계속 돈 벌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엄마를 보면, 매일 열심히 일해도 매일 힘드니까, 왜,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힘든데, 그 안에서 또 다른 몸뚱이를 내놓는 건, 왜.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고, 그런 일이 정말 근사한 일이라고 다들 스스로 진짜 진심 그렇게 생각할까요? 혼자 있을 때, 이거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좋지 않은 일이 분명하다. 생리가 온다는 건 수정할 수 있다는 것, 수정은 곧 임신. 임신이란 이렇게 먹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인간이 한 명 늘어난다는 것. 그거 생각하면 절망이다. 너무 심하잖아. 나는 아이 따위 절대로 낳지 말아야지.
--- p.55

예쁨이란 좋은 것. 좋은 것이란 행복과 이어지는 것. 행복에는 여러 정의가 있을 테지만, 살아 있는 인간은 누구나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의 행복을 찾는다. 속수무책으로 죽고 싶은 사람조차 죽음이라는 행복을 찾는다. 자신을 없애고 싶다는 행복을 찾는다. 행복이란 그 이상은 쪼개서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최소이자 최대의 동기이고 대답이므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이유일 거다. 그래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마키코에게는 뭔가 더, 행복 같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한결 구체적 이유가 있는지도.
--- p.69

소설을 쓰는 것은 즐겁다. 아니, 즐거운 것과는 다르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게 내가 평생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다고 확신하는 부분이 있다. 설령 내게 글재주가 없다 해도, 나더러 글 쓰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해도, 나는 그 확신을 쉽사리 접지 못한다.
--- p.110~111

미도리코는 일대가 연보랏빛으로 물든 창밖을 가리키며 내 눈을 보고, 다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운 쪽을 향해, 아직 보지 못한 쪽을 향해 펼쳐지는 하늘에 손으로 그린 것 같은 구름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그 틈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와 보랏빛의, 엷은 주홍빛의, 짙은 푸른색의 농담濃淡을 부드럽게 에워쌌다. 자세히 보면 아득히 먼 상공에서 부는 바람이 보이고, 손을 뻗으면 세계를 감싼 막을 살짝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재현할 수 없는 멜로디처럼, 하늘은 빛깔들을 머금고 있었다.
--- p.158

마키코가 쪼글쪼글한 입술을 오므리고 내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그러고는 글씨 쓰는 시늉을 하며 “그럼, 될 거야, 될 거야, 꼭”이라 말하고 얼굴을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마키코의 웃는 얼굴 속에 고미 할머니가 있고, 엄마가 있었다, 그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같이 울고 웃었던?멀리서 나를 발견하면 언제나 달려왔던 마키코, 교복을 입은 마키코, 자전거를 탄 마키코, 장례식 내내 눈을 감고 울던 마키코, 월급봉투에서 돈을 꺼내 실내화를 사주었던 마키코, 미도리코를 낳고 병실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마키코, 늘 내 옆에 있었던?그때그때의 마키코가 그 얼굴 속에서,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고 하품하는 척했다
--- p.184

변명처럼 자료를 읽고, 메모하고, 똑같은 곳을 쓰고 고치는 날들이 이어졌다. 서점에는 날마다 몇십 권씩 신간이 들어오고 신인 작가가 속속 탄생했다. 열람 중인 불임 치료 관련 블로그는 늘거나 줄거나 하면서도 많은 아기가 태어났다. 어제까지와 다른 인생, 다른 감정을 만나 새로 한 발 내딛는 사람들이 언제나 어딘가에 있었다.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였다. 가만히 웅크린 채, 어찌나 눈부신지 절로 실눈이 떠질 것 같은 일들로부터 시시각각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 p.335~336

“여자에게 중요한 게 뭔데?”
“여자로 존재하는 일이 얼마나 아픈가 하는 거. 이런 말하면 아, 네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남자도 충분히 아프거든요 같은 말 하는 인간이 있는데, 남자가 안 아프다고 누가 그랬어? 그야 아플 테지, 살아 있으니까. 문제는 누가 아프게 했나, 어떻게 하면 그 아픔을 제거할 수 있나잖아. 남자가 아픈 건 누구 탓이야?”
--- p.411

“다들 도박하는 걸로 보여요. 자기 아이들도 자기들처럼, 아니 어쩌면 한결 행복하게, 태어난 걸 축복으로 여기며 살 거라는 데 판돈을 건 것 같다고요. 인생에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오르막도 내리막도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사실은 행복이 훨씬 크다고 믿죠. 그러니까 도박도 할 수 있어요. 언젠가 모두 죽지만 인생은 의미 있고, 고통에도 다 뜻이 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다고 자기 아이들도 믿을 줄 알아요. 설마 도박에서 잃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자신만은 괜찮을 줄 알아요.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을 뿐. 자신을 위해. 더 지독한 건 그런 도박을 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것은 아무것도 걸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 p.463

전화를 끊고 부엌으로 가, 우두커니 서서 찬물을 마셨다. 방으로 돌아와 커튼을 젖히고, 창에 얼굴을 갖다대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옆 아파트 외벽을 따라 늘어선 초록 나무들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그 너머에 파란 여름 하늘이 보였다. 가령 쌘비구름 견본첩 같은 게 있다면 첫 페이지에 실릴 성싶은 훌륭한 쌘비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을 나는 잠시 바라보았다. 구름은 여러 빛깔을 머금고 있었다. 눈부시게 새하얬지만 잘 보면 군데군데 회색과 연청색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 p.503

8월 한낮의 뙤약볕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고, 흡사 플래시를 터뜨린 한순간을 그대로 잡아 늘려 초록 잎사귀도, 아스팔트도, 바닥에 적힌 일단 멈춤글자도, 전신주도 할머니도 끌차도, 나아가 그것들의 그림자마저도 강렬한 빛 속에 가둬버린 사진 속 풍경을 보는 듯하다. 이것은 몇 번째 여름일까.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내 나이와 같은 햇수일 터인데, 왠지 그와는 다른 숫자, 올바른 별도의 숫자가 세계의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나는 한여름의 하얀 빛을 바라보았다.
--- p.504~505

“떠올려보려고 해도, 그게 어렵거든요.” 아이자와 씨가 웃었다. “그래도 아버지 말씀을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살아 있으면 별별 성가신 일이 많지만 100년 따위 순식간이야, 한 사람의 인생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따위 우주에 비하면 눈 한 번 깜박하는 시간도 안 되는 거야. 그 속에서 울고 웃는다고 생각하면, 기운 나잖아. 하지만 그건 언젠가 자신도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야, 자신은 물론이고 태양마저 다 타버리고 지구와 인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가 반드시 오거든, 보이저는 어쩌면 그 뒤에도 우주의 끝을 계속 날고 있을지 몰라. 아버지는 곧잘 그런 이야길 하셨습니다.”
--- p.540~541

그 아기는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 기억 속에도 없고 상상 속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는, 누구도 닮지 않은,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 아기는 온몸을 떨며 커다란 소리로 울고 있었다. 어디 있었니. 이제 왔니.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는 소리로 말하면서, 나는 내 가슴 위에서 우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 p.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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