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의 발발은 한센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태도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쟁에 참여했다가 병을 얻어 돌아온 병사들은 신성한 전쟁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존경받았다. 이들은 소속된 집단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라자루스 수도회가 맡고 있는 은신처에서 도움을 받을수 있었다. 1098년에 라자루스 수도회는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의료적인 목적 외에 군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수도회로서의 임무(전쟁 과정에서 질병이 발생한 환자를 담당하는 임무)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12세기에 십자군이 한창일 때 라자루스 수도회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시설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함으로써 한센병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유럽 전역에 걸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 네트워크가 갖춰졌으며, 이와 같은 역사적인 이유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임무가 되었고, 유럽에서 병원 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 p.49
베살리우스의 최대 장점은 자신이 얻은 확정적이고 만족할 만한 결론에 대해 전혀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이고도 자신 있는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이들이 그의 발표를 지지하도록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교회의 이론을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나, 늘 자신이 확인한 것을 주장하던 그는 “육체의 뼈대 중 한 개는 불멸성을 가지고 있고, 이 뼈는 육체가 부활할 때 그 육체의 핵심을 형성한다”라는 중세 교회가 꾸민 이야기를 자신 있게 부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세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시기였으므로 그의 이 같은 태도는 교회로부터 적대감을 유발했다. 그의 연구 결과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던 반대파 학자들이 그의 책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했고, 결국에는 학술적인 연구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 p.68
하비는 혈액순환 이론이 옳다는 생각을 완전히 굳혀가고 있었으나 모두를 납득시킬 만한 증거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뱀을 이용해 실험을 하면서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세 번째 증거는 뱀의 혈관을 묶어 관찰하면서 발견되었다. 뱀의 대동맥을 묶으면 심장에 피가 모이지만, 뱀의 대정맥을 묶으면 심장에 피가 고이지 않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즉 심장의 피는 대동맥을 통해 나갔다가 대정맥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다. 피가 혈관을 통해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p.85
워렌은 마취제가 수술을 도와줄 것이라는 모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웰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1845년 1월 20일 웰스는 워렌의 수업을 받기 위해 모인 의과대 학생들 앞에서 치과 환자에게 아산화질소를 흡입시킨 후 발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환자가 통증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것이다. 모턴은 슬그머니 도망을 가버렸고, 웰스는 주위의 비웃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밝혀진 실패의 원인은 학생들 앞에서 웰스가 사용한 아산화질소의 양이 너무 적었던 것이다.
--- p.127
제멜바이스의 주장은 의사들의 사정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것으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자신들이 행한 방법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제멜바이스는 의학의 역사를 뒤바꿀 만한 위대한 발견을 했지만 전혀 인정받지 못한 채, 다른 의사들과 함께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 p.157
그러나 파스퇴르에게 일단 마음먹은 일은 정복의 대상이었고, 대부분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으니 탄저균도 또한 파스퇴르의 공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여러 조건을 바꿔가며 연구하던 파스퇴르는 드디어 42~44°C에서 탄저균이 약독화되어 동물에게 거의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고, 14마리의 양을 이용해 예방접종 가능성을 검사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성공이었다. 파스퇴르는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
--- p.170
파치니는 콜레라의 원인을 찾기 위한 연구를 계속해 이와 관련된 연구 논문을 지속적으로 발표했으며, 콜레라가 수분을 과다하게 배출해 전해질 불균형을 일으키는 질병이라는 것을 알았고 정맥에 10g의 염화나트륨을 주사하면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발견했다. 파치니는 당시까지 기세를 올리고 있던 미아즈마설을 부정하고, 콜레라가 감염병이라는 지금으로서는 극히 타당한 내용을 발표했다. 독신으로 살면서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파치니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학계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불운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 p.218
기대하던 결과를 얻은 밴팅과 베스트는 신바람을 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자 추출물에서 혈당을 조절하는 물질을 순수 분리하기 위해 계속 연구했다. 1921년 11월 14일 생리학교실 내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에 앞서 매클라우드가 이 두 명을 소개하면서 자신을 포함해 ‘우리’가 당뇨병을 조절하는 물질을 발견했다고 이야기했다. 매클라우드의 도움을 받아 논문을 작성하기는 했지만, 밴팅은 그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논문 작성 초기에는 밴팅과 베스트의 이름만 올라 있었으나 이때부터 매클라우드가 인슐린 발견 업적에 자신의 이름을 공공연히 사용했고, 이미 관계가 벌어지고 있던 밴팅과 매클라우드는 더욱 껄끄러운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 p.261
에이크만은 어느 날 양계장의 닭들에게 이상한 병이 퍼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닭들은 대개 다리가 약해져 후들거리다가 더 심해지면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에이크만은 왠지 자신을 끌어당기는 미지의 힘을 느낄 정도로 이 현상에 이끌려 닭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닭들의 증세가 갑자기 호전되기 시작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 골몰히 생각하던 에이크만은 먹이가 원인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모이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 p.277
플렉스너의 엉터리 가설이 소아마비에 대한 학문적 발전을 늦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플렉스너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 미국 과학계가 인정한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세균성 이질균 발견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겨 ‘대과학자’라는 별명을 얻은 그의 가장 큰 공적은 누가 뭐라 해도 원숭이를 이용한 소아마비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였다. 실제로 그는 원숭이에게 폴리오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실험으로 소아마비에 대한 지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의 소아마비 연구를 지체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니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 p.301
파스퇴르는 1877년 미지의 미생물이 포함된 소변에서 탄저균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응용해 탄저균과 일반 세균을 함께 실험동물에 접종한 결과 탄저 발생 빈도가 현저히 감소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을 통해 파스퇴르는 “한 가지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의 성장을 억제하고 방해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고, 이를 이용하면 병원성 미생물에 대해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 p.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