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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

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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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 (큰글자도서)
[도서] 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 (큰글자도서)
옥혜숙,이상헌 공저 생각의힘
0% 29,000
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 (큰글자도서)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5월 23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334g | 128*194*20mm
ISBN13 9791190955607
ISBN10 119095560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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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애는 공부를 잘해서 학교에선 맡아둔 일등이고, 학력고사는 부산에서 수석을 할지 모른다는 소
문이 들렸다. 얼굴을 보는 것도 좋긴 하지만 걱정도 되었다. 성적이 너무 차이가 나니까 괜히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했다. 같이 종이접기를 하던 친구들에게 의논했더니 한결같이 어이없다며 격려의 잔소리를 해줬다. 첫사랑을 만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인데 네가 지금 자존심 따위를 내세울 때냐고 말이다.
알았어, 용기를 내서 만나볼게.
--- p.24 「1장∥여학생」 중에서

이제 둘이 남아서 서로 바라보고 앉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말을 들었
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천년의 고독을 끝내고 내뱉은 첫 언어가 정작 고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입 속에 묻혀버린 듯했다. 여전히 환하게 예쁜 그녀의 얼굴만 또렷했다. 그 순간 나는 음악다방의 이름마저 운명적이라 생각했다. 〈합창〉 심포니, 그 절정은 〈환희의 송가〉.
“신성한 그대의 힘은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다시 결합시키고 (…)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받은
자여, 다 함께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나는 환희를 얻었고, 기억을 잃었다. 드디어 그녀를 본 것이다.
--- p.31 「1장∥남자」 중에서

연극을 보러 갔던 것이 우리의 첫 데이트였다. 그 당시 최고의 하이틴 스타 최재성이 주연한 〈에쿠우스〉
였는데 그가 표를 예매했다고 했다. 짧은 머리에 아이보리와 밤색이 혼합된 트위드 원단의 자켓을 말쑥하게 입었다. 한 손에 책을 든 그와 공연장 맨 뒤에서 입석으로 관람을 했다. 지금도 나는 연극을 별로 즐기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도 방점은 첫 데이트에 있었다. 연극의 내용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마음은 두근두근 온통 그 애라는 콩밭에 있는데 제아무리 유명한 하이틴 스타가 무슨 소용이랴.
--- p.38 「2장∥여자」 중에서

그 이후로 나는 삶의 ‘설계’를 믿지 않는다. 설계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다. 하지만 설계한 대로 될 것이라
믿지 말라. 삶의 고통만 더해진다. 삶을 설계할 때 다가오는 찰나 같은 짜릿함, 딱 그것뿐이다.
우리는 연애를 설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찬란하게 버티었다.
--- p.46 「2장∥남자」 중에서

속에 품고만 있을 때도 늘 심장이 콩닥거리게 했지만 활자로 적힌 ‘좋아한다’라는 단어를 보는 것은 더욱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가 주고 간 ‘좋아한다’는 말이 적힌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문신이 되도록 그 부분만 기억했다. 항상 A4용지 서너 장을 가득 메운 그의 편지에는 조금은 낯선 기숙사에서의 생활, 신입생 환영회에 가기 싫어서 빼먹은 이야기와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내가 선물한 해운대 사진을 바라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늘 시를 적어서 보냈다. 좋아하는 구절에 밑줄을 쳐서 그 부분에 대한 나의 해석을 묻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감성에 한 번도 제대로 맞장구를 쳐준 적이 없어서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나는 시를 잘 몰랐으나, 그가 시를 쏟아내는 마음은 잘 알겠더라.
--- p.55 「3장∥여자」 중에서

뜨거움이 다시 그리움을 만나는 날이면, 긴 편지를 썼다. 계단에 앉아서 쓰고, 잔디에 누워서도 써보고, 도서관 창 쪽에 자리를 잡는 날이면 편지부터 썼다. 우체국 앞에 있던 벤치에 앉아서도 쓰고, 바로 보냈다. 어떤 날은 아침에 보내고, 저녁에 다시 보냈다. 그리움의 언어는 담지 못하고, 시절의 뜨거움에 대해서만 썼다. 난해한 말, 겉도는 말, 들떠 어쩔 줄 모르는 말을 무수히 적었다. 하지만 그녀의 편지는 깔끔하고 명징했고, 무엇보다도 쾌활하고 밝았다. 봄날의 언어는 거기에 있었다.
--- p.56 「3장∥남자」 중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따뜻한 눈으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진심으로 말을 걸었다. 특별히 나에겐 항상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었고, 기꺼이 품으로 보듬어주었다. 논리라고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는 억지 투정을 받아주고 기다려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었다. 사귐이 길어져 자연스레 결혼까지 연결되었지만 이런 사람이면 평생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단지, 유머가 좀 많이 부족했지만 그건 내가 메꾸면 되었다. 그가 많이 곤란했겠으나 마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던 우리 집의 압력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나도 어서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
--- p.103 「4장∥여자」 중에서

결혼식은 시작되었는데, 내 마음과 다리는 진정되지 않았다. 식장으로 걸어들어가서 주례 선생님 앞에 섰고 옆으로 그녀가 환하게 다가왔는데, 내 머릿속은 하얘지고 다리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던가. “남자는 지쳐서 결혼하고 여자는 궁금해서 결혼하는데, 결국에는 둘 다 실망한다.” 그래, 나는 지쳤다. 실망해도 좋으니, 이 망할 결혼식만 빨리 끝내달라고 빌었다.
그 와중에, 그녀는 또 왜 이리 아름다운 것인가. 여기가 바로 늪이로다.
--- p.116 「4장∥남자」 중에서

세월은 힘이 세다. 아내는 더는 마르크스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이름이 남편의 삶에 불안과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대단한 여유와 인내심이었다. 그녀 마음속 어딘가에 깊은 우물 하나가 있어, 나는 몰래 거길 찾아가 안식의 물을 퍼올릴 수 있었다. 덥고 숨 가쁜 날이 많았지만, 목마른 날은 없었다.
--- p.130 「5장∥남자」 중에서

사실 그의 말에 크게 동요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주류이든 비주류이든 경제학 공부를 이렇게 오래도록 하는데 설마 밥이야 굶겠느냐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여하튼 경제학이 아닌가.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 p.132 「5장∥여자」 중에서

바람은 오면, 곧 가는 법이다. 정신없이 흔들다가, 어느 날 고요해졌다. 햇살은 따스하고 꽃은 사방으로 피
어나고 그 사이로 초록풀이 촘촘히 자라던 날,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이제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따뜻해지고, 또 초조해졌다.
그 아이가 우리 삶을 다른 곳으로 데려갈 바람인 줄은 몰랐다.
--- p.142 「6장∥젊은 남편」 중에서

유학을 간다고 했다. 정확하게는 불확실한 아기의 병을 좀 더 잘 알아보기 위한 ‘외유’였다. 더 나은 병원을 찾아 외국으로 가는 건 재벌 회장들이나 하는 걸 드라마에서 봤는데, 그게 우리였다. 단지 다른 점은 우린 돈이 없다는 거였다. 지도교수님이 의료비가 비싼 미국보다 영국을 권하셨다. 우리는 미국도 몰랐지만 영국도 모르는 나라이긴 매한가지였다. 태어나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p.157 「6장∥젊은 아내」 중에서

우리는 한참 멍하게 있었다. 서울에서 “다 어려울 거예요”라고 들은 지 몇 개월 만에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로 “다 괜찮을 거예요”를 듣고 있었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믿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병원 밖으로 나오고서야, 우리는 바라보고 웃었다.
얼굴에 비친 옅은 미소, 내 마음속에서는 가장 큰 웃음이었다.
--- p.174 「7장∥아빠」 중에서

남편의 논문이 통과되었다. 3년 반의 유학생활 동안 우리는 딸의 건강, 둘째 아이, 학위, 평생 친구들, 약간의 빚 그리고 시커멓고 기미 가득한 얼굴의 아줌마 한 명을 얻었다. 이제는 또 직장을 따라 스위스 제네바로 간다고 한다. 그곳은 불어를 쓴다고 했다. 영어면 어떻고 불어면 어떠랴. 있는 재산을 까먹으면서도 살아남았고 돈을 벌면서 살 수 있다는데 그깟 언어가 무슨 대수랴. 용감하게 떠났다.
나는 순진했고 제네바는 만만치 않았다.
--- p.196 「7장∥엄마」 중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한국말을 가르치기 위해 아이들을 한글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둘째까지 유아반에 들어가면서는 나도 한글학교 선생님이 되어 함께 다녔다. 그때부터 옥쌤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바깥세상에서는 흰색은 종이고 검은색은 글자인 생활이었다.
--- p.202 「8장∥옥쌤」 중에서

또 그놈의 영어가 문제였다. 외교적 영어라니. 나더러 영어 공부를 새로 하라는 뜻이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집에서 자신만의 전투를 벌였다. 다섯 살짜리 딸과 막 돌을 지낸 아들은 아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둘에게는 또 다른 시작이었다.
--- p.204 「8장∥이박사」 중에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가진 사랑이 100이라면 당신에게 50, 두 아이에게 각 25씩 나누고 있는데,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이다. 이 말에 멋진 리액션을 기대했던 내 바람과는 달리, 남편은 아주 담담하고 심각하지만 따뜻함이 묻어나는 대답을 했다.
“내가 50의 사랑을 받아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그중 25는 너 자신을 사랑하는 데 쓰면 좋겠어.”
짧지만 내게 큰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지금도 삶의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고마운 말이기도 하다.
--- p.234 「9장∥엄마」 중에서

제네바 호수 물처럼 고요하게 흘러가는 생활이었지만, 봄바람은 불고 괜스레 흔들리는 날들도 있다. 흔들림의 레퍼토리는 뻔했다. 나는 노래 18번을 부르는 것처럼 “우리, 한국에 갈까?” 물었다. 아내는 “그래” 하고 짧게 답했고, 아이들은 내 질문의 심오한 함의를 알지 못했다. 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우리 집 민주주의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탓에, 나는 바짝 엎드려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 p.240 「9장∥아빠」 중에서

제네바에서 20년을 산 아파트 열쇠를 부동산 직원에게 넘기는데 눈물이 났다. 집주인에게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덕분에 잘 살다가 간다고. 우리 가족에게 행복한 일이 많았던 고마운 집이었다고. 물론 남편이 1년 가까이 아팠고, 도둑이 두 번이나 들어서 집안 살림을 홀랑 뒤집어 쑥대밭을 만들고 몇천 프랑을 들여 문짝까지 교환했다는 말은 생략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니까.
이렇게 그와 내 인생의 한 챕터에 또 다른 마침표를 찍었다.
--- p.252 「9장∥혜숙」 중에서

얼마 후 제네바를 떠났다. 짧은 여정을 계획하고 와서 삶의 큰 둥치를 남긴 곳이었다. 옛 아파트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벽에 아이들이 남긴 흔적, 키를 재어 기록했던 나무 기둥, 좁고 어두웠던 부엌, 전등갓에 서캐처럼 앉은 먼지, 그림 하나는 있어야 한다면서 벽에 어지럽게 박은 못들 그리고 발코니에 살뜰하게 모여들던 햇살. 우린 잠시 흔들렸다.
그래, 좋은 시절이었다.
--- p.254 「9장∥상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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