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와 같이 움직였다. 그는 차를 세워 놓은 길가 오른편으로 키 큰 나무와 덤불이 있는 곳을 미리 봐두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에드워드에 대한 내 마음이 변할 거라 생각한다면.” 여자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당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럴 일 없어. 절대로.”
에드워드라! 사랑에 빠져서 교만하긴, 그는 역겨움이 치밀었다. “내가 마음을 바꾸었어.” 그는 후회하듯 차분히 말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말랑말랑한 여자의 팔뚝을 손으로 꽉 붙들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여자를 고속도로 쪽으로 몰고 갔다.
“멜키오르, 이렇게까지 멀리 오면 안 되는데……”
남자는 여자를 고속도로 옆 덤불 속으로 홱 떠밀며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넘어질 뻔했지만 왼손으로 여자의 손목을 계속 붙든 채, 오른손으로 여자의 옆얼굴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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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는 두 손으로 개 대가리를 으스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면서 정석대로 개를 안고 자리로 돌아왔다. 한 손으로는 따뜻하고 헐떡거리는 작은 가슴을 받쳐 들고, 나머지 한 손은 대가리에 올려 달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클라라 옆쪽 바닥에 강아지를 살포시 내려놓고 목줄을 채웠다.
“당신은 얘가 싫지?” 클라라가 물었다.
“버릇없는 것 같아서 그래. 그게 다야.” 클라라가 제프를 안아 무릎에 앉히자 월터는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아지를 토닥이자, 아내의 표정은 아름답고 너그러워지더니 애정이 넘쳐흘렀다. 아내는 아기를, 자기 자식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제프를 쓰다듬는 클라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월터가 제프에게 얻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월터는 제프가 못마땅했다. 녀석의 건방지고 이기적인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월터를 쳐다볼 때마다 멍청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난 이렇게 잘 사는데 아저씬 뭐냐?” 제프는 클라라에게 완전무결한 존재지만, 자신은 클라라에게 하찮은 존재인 것 같아서 월터는 개가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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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브리스 씨 말씀으로는 부인이 돌아가시던 날 밤, 당신이 해리스 레인보우 그릴에서 버스가 몇 분이나 정차하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하던데요.”
월터는 드브리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커피를 마시다가 고개를 돌려 월터를 바라보던 둥글고 묘한 얼굴이 떠올랐다. 월터는 입술을 축였다. 코비가 그를 용의자로 지목한 후 그의 생김새를 드브리스에게 설명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보시다시피, 이게 전부 다 우연의 일치죠.” 코비는 기쁜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월터는 펄쩍 뛰고 싶었다. “드브리스 씨는 피츠버그 운송회사 소속 트럭 운전사라서 버스를 타고 피츠버그로 복귀하실 때가 가끔 있습니다. 저희가 이분을 알고 있어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혹시, 그날 밤 버스 휴게소에서 미심쩍은 사람이 있었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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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문이 열리더니 웬 남자가 들어왔다.
키멜이 일어섰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영업 안 합니다.”
남자는 웃으며 키멜을 향해 계속 걸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멜키오르 키멜 씨 맞으시죠?”
“네, 무슨 일로?” 키멜은 이렇게 물었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평소 같았더라면 진작 눈치챘겠지만 키멜은 남자가 그의 이름을 묻기 전까지 형사인 줄도 몰랐다.
“필라델피아 경찰서에서 나온 코비 경위라고 합니다. 잠깐 시간 되십니까?”
“물론이죠.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주문서를 들고 있던 손을 바지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고 반대편 손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우연한 상황이 겹쳤습니다.” 젊은 경위가 키멜의 높은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기댄 채 모자를 도로 썼다. “얼마 전 버스 휴게소 인근에서 사망한 여자에 관한 기사를 보셨습니까?”
--- p.177
“코비는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월터가 엘리의 말을 잘랐다.
“만일 코비가 당신을 추궁한다 해도, 당신이 왜 거짓말을 해야 했는지 난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어요. 당신은 뭔가 숨기려는 게 진짜 있는 것처럼 오해를 사게 행동한다고요. 내가 코비 같은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믿고 있는 이야기를 내게 들이밀고,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를 주장을 할 경우, 내가 당신한테 몇 가지 물어봤다고 해서 당신이 날 비난하면 안 되는 거라고요.” 엘리는 화난 목소리로 끝까지 말했다.
월터는 엘리의 지적에 대해 하고픈 말이 있었지만 꾹꾹 눌렀다. 그런 다음 엘리의 의심을 누그러뜨릴 만한 얘기를, 그녀를 붙들어 둘 수 있는 말을 미친 듯이 찾았다. 왜냐하면 엘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코비의 주장은 말도 안 됩니다.” 그는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코비의 말대로 내가 그 일을 저지른 다음 휴게소 주변을 15분간 서성이며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내가 죽인 여자가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 p.234
“우린 둘 다 굉장히 비슷한 처지에 놓인 무고한 사람들이라고.” 키멜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택하우스가 한 얘기도 바로 이거였어. 그래서 나를 보러온 거고.”
코비는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집에서 맞을 때처럼 키멜의 몸이 반으로 접혔다. 키멜은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내리 꽂히는 줄 알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키멜은 몸을 수그린 채 조금씩 숨을 골랐다. 바닥에 검은 점이 보였다. 검은 점이 점점 늘어났다. 코에서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입을 벌려 숨을 쉬면서 피를 맛보았다. 섬뜩하면서도 짭짤한 오렌지 맛이 났다. 코비가 키멜의 주위를 맴돌자, 키멜도 그와 같이 돌면서 검은 형체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바로 그때, 키멜이 코를 팽 풀어 축축해진 손을 옆으로 털었다. “이 바닥에 피를 묻히겠다 이거지!” 키멜이 소리쳤다. “저 벽에 피 칠갑을 하겠다는 거지! 날 고문해서!”
--- p.265
월터는 존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무슨 희망이 남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동안 절대로 꺼내지 못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어서였다. 지난 주, 그는 존에게 전화를 걸어서 존이 롱아일랜드로 전화했을 때 뚝 끊어버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존은 장거리 전화를 하던 그 목소리로 화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진정이 되면 나한테 다 말해도 좋아, 월터.” “난 진정했어. 그래서 내가 전화한 거잖아.” 그러고는 언제 만날 수 있는지 월터가 물으려는 찰나, 존이 입을 열었다. “네가 겁을 먹어서 사실을 외면하는 짓을 이제라도 그만둔다면, 그 사실이 뭐든……” 그 순간, 월터는 사람들이 예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사실을 마주하기가 겁이 났다. 아무도 그를 믿어 주지 않아서 두려웠다. 월터가 지금껏 장황하게 일일이 반박했는데도 존마저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우리 아무 말도 하지 말까?” 결국 월터가 존에게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전화를 끊었고, 존은 여태 전화하지 않았다.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연락해, 형.” 클리프도 지난 주 편지를 보냈다. “형이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 전까진, 이건 끝나지 않아…….”
--- p.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