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맨은 왜 종교를 알아야 하는가, 비즈니스맨을 위한 종교 안내서
당신은 종교를 경제, 정치, 법률, 문화, 사회와 동떨어진 무언가로 생각할지 모른다. 더군다나 당신에게 종교가 없다면 종교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단지 종교인에 대한 편견만 없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사회생활의 밑바탕에 종교가 깔려 있다. 따라서 종교를 이해하지 않고서 글로벌 사회에서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저자 하시즈메 다이사부로는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종교를 쉽고 간략하게 설명함으로써 종교로 들어가는 이해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세계를 오가며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다. 종교는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척도다.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힌두교의 윤회 사상을 모르고서는 카스트제도가 국제적인 비난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도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또한 중국의 유교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중국에서 정치가 경제보다 중요한 이유를, 신도를 모르면 일본에서 비즈니스, 즉 경제가 종교나 정치보다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글로벌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조건은 종교가 다른 타 문명권 사람들이 서로 맺는 국제적인 관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바람직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종교들간의 상호관계를 파악하고 다른 문명권의 생활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글로벌 사회에서 종교를 모르고 비즈니스가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여섯 개의 강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강과 2강에서는 기독교를 통해 유럽문명과 자본주의 정신을 설명하고 3강에서는 이슬람교를 통해 이슬람 문명을, 3강에서는 힌두교를 통해 인도 문명을, 5강에서는 유교와 불교를 통해 중국 문명을, 마지막 6강에서는 일본인들에게 종교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구원받을 가능성은 미리 정해져 있다’ 프로테스탄트와 미국의 개인주의
미합중국은 종교개혁 이후 영국 국교회의 탄압을 피해 뉴잉글랜드로 이주해온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졌다. 청교도들은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한 구약성서의 말씀처럼 북미대륙이야말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준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은 많이 닮았다. 저자 하시즈메 다이사부로는 전 세계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지원하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점을 들며 미국이 이스라엘을 편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의 건국 사정과 통하는 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스라엘처럼 원주민을 몰아내고 정착한 청교도들은 칼뱅의 구원예정설에 따라 신앙생활을 영위했다. 구원예정설은 인간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것인지 받지 못할 것인지는 신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 즉 종교적인 경건이나 도덕적인 행위로 바꿀 수 없다는 사상이다.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여부는 신만이 알 수 있고 인간은 알 수 없는데 단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고 부자가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의 증거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사실 미국의 철저한 개인주의와 인간불신을 초래했다. 구원 가능성은 오로지 신과 나의 관계에만 달려 있기 때문에 가족도, 이웃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철저한 개인주의로 귀결된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연대감으로 묶인 공동체 사회가 아닌, 법률적 관계 혹은 사회적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개인주의 사회로 발전했다. 이는 미국이란 나라가 왜 그토록 변호사들로 넘쳐나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종교든 힌두교가 될 수 있다. 여덟 번째 화신, 붓다
힌두교에서 신은 원래 실체가 없고 매번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기 때문에 신의 드러난 형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신의 출현이 바로 ‘화신化身’이라는 것이다. 신이 ‘화신’한다는 개념이야말로 힌두교의 근본적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어떤 종교든 힌두교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인도인들은 비슈누 신의 여덟 번째 화신을 붓다로 보고 있다. 인도에서 끝내 불교가 사라진 이유도 불교를 힌두교의 일부로 끌어들인 힌두교의 역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붓다가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비슈누 신이 한 말이 될 것이다. 사실 화신 개념은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사회적 안정을 꾀하는 데 있어 실로 편리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힌두교의 논리대로라면 서로 다른 신을 믿는다 해도 결국 구체적인 신들을 초월한 단 하나의 신을 따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는 일신교의 우상숭배 금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상이다. 일신교에서 신은 엄밀히 하나여야 한다. 일신교의 신은 절대적인 중심이므로 유일신 이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도의 힌두교에서 신은 하나든 다수든 중요하지 않다.
사회적 통합이냐, 분열이냐, 글로벌 사회의 핵심 키는 신이 쥐고 있다
이처럼 종교는 주어진 지리적, 역사적, 사회적, 지정학적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유럽의 기독교와 중국의 유교는 서로 대립적인 지형 속에서 만들어진 만큼 그 성격 또한 매우 달랐다. 사방이 산맥과 지중해로 둘러싸인 유럽은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물자의 유통이나 이동이 어려워 비교적 지방정권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는 데 비해 광활한 평지로 이루어진 중국은 항상 외적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수많은 도시국가들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끊이질 않고 일어났다. 당연히 중국에선 정치적 통합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제도를 뒷받침해줄 유교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중국의 유교는 사실 종교라기보다는 정치사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유럽에선 기독교가 국가 간 분쟁을 조정하는 쿠션 역할을 하면서 종교가 정치나 군사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부분의 종교가 국가의 안정과 통합을 이루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던 데 반해 인도의 힌두교는 종교적 특성상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데 상당한 장애로 작용했다. 인도의 힌두교는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 혹은 불교의 붓다마저 인도신의 변형으로 보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사상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인도의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은 한편으론 국민들 간의 상호 무관심이라는 병폐를 낳아 국민적 통합을 방해하고 있다. 게다가 불평등을 은폐하는 카스트제도로 말미암아 경제적 양극화가 뚜렷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각지대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저자는 종교간 상호 관계를 비교 고찰함으로써 그 사회의 특성과 민족적 성향 그리고 지향하는 가치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평화주의’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평등’을 기반으로 한다
흔히들 이슬람의 원리주의 하면 9.11테러를 비롯해 서구세력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을 주장하는 급진주의자 혹은 테러리스트를 떠올린다. 하지만 사실 원리주의는 기독교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북미 대륙으로 건너온 퓨리턴들이 오로지 성서에만 매달리고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저자는 본문에서 이슬람의 원리주의를 과격한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일 뿐 아니라 폭력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이슬람교의 본질은 평화주의에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슬람교에도 무함마드의 정통 후계자를 두고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지면서 종교적 분쟁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기독교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갈라지고 다시 서방교회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갈리면서 수많은 종교전쟁을 치렀던 것을 생각하면 메카순례를 같이 돌며 깊은 연대감을 드러내는 무슬림이야말로 평화주의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이슬람교와 대립하는 종교로는 바로 인도의 카스트와 힌두교를 들 수 있다. 이슬람교는 모든 면에서 불평등한 제도인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기 때문에 누구든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누구와도 식사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사실 카스트야말로 평등주의에 입각해 만들어진 제도임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전근대적인 카스트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윤회’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카스트와 윤회는 서로 표리관계에 있다. 지금은 비록 천민으로 태어났어도 다음 생에서는 가장 높은 카스트로 태어날 수 있다고 보는 윤회 사상이야말로 지금의 카스트를 지탱하는 힘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종교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교를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안 됨을 강조한다. 제대로 알아야만 종교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고 그럼으로써 편견 없는 진정한 국제 사회의 교류의 장이 열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