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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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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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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9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435쪽 | 804g | 153*224*30mm
ISBN13 9788934954859
ISBN10 89349548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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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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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듯 말듯하던 봄이 왔다. 그 한발 앞에서 쓰러졌다. 우수리사슴들에게는 공포의 장소지만, 그들이 해안으로 이동하는 봄철, 해골분지를 포함한 라조 동해안 지역은 블러디 메리가 새끼를 낳아 기르기에 더없이 좋은 영토가. 그녀가 새끼를 잘 키우기로 소문난 또 다른 이유다.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훅 불어내는 콧김의 감촉이 나의 왼손 등을 스쳐가고, 마침내 그녀의 죽음까지 목격하리라고는,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p.28

낙엽을 끌어다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폈다. 침낭 속으로 기어들자 잠자리가 제법 안락하다. 폭풍우 소리도 잠자리의 운치를 돋워준다. 내가 누워 있는 이 자리에 누워 있던 호랑이는 누구일까? 블러디 메리의 가족은 이 폭풍우를 어디서 피하고 있을까? 내 마음속 상상의 나래가 바깥세상의 소란스러움과 섞여 아득해지더니 스르르 잠이 들었다. ---p.125

밀렵꾼은 늘 새로운 밀렵 방식을 찾아낸다. 새로운 밀렵 방식이 도입되면 한동안 호랑이들이 희생을 치른다. 특히 어린 호랑이와 젊은 호랑이들이 많이 당한다. 특수 올가미와 무인총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도 그랬다. 노련해지기까지 고비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호랑이들도 대응법을 찾아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에 대한 종족방어 수단을 습성화시키고 진화시킨다. 우수리 숲에서의 도전과 응전, 인간과 호랑이 사이의 냉혹한 생존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p.217

렌즈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블러디 메리가 냄새를 맡는다. 예민한 포커스를 만지느라 장갑을 벗은 왼쪽 손등 위로 뜨뜻한 콧김이 훅 끼쳐왔다. 등골이 깨질 듯 경직되며 소름이 돋아 올랐다. 콧김과 함께 그녀의 뻣뻣한 수염이 왼쪽 손등을 스쳤다. 손등의 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p.253

한 마리가 비트 지붕 위로 올라왔다. 연이어 또 한 마리가 올라온다. 우지직, 뿌지직! 지붕 송판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호랑이들이 지붕 위에 덮어 놓은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의지와는 관계없이 살이 떨린다. 지붕도 곧 무너질 것처럼 울렁거린다. 네 마리 맹수가 서로의 공격을 가속화시키며 구덩이 속의 한 무력한 존재를 마비시키고 있다. ---p.254

호랑이를 기다리는 일은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다. 오지 않는 호랑이를 매일 기다린다. 영하 30도 오지의 땅을 파고 들어가 10분마다 카메라를 보고 켤 때마다 기대를 부풀린다. 하루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간다. 그래도 안 오면 '설마 올까?' 그렇게 몇 달을 안 오면 '오늘도 안 오겠지' 처음에 집중하다가 서서히 흐려지는, 세월의 함정에 빠져든다. 그러다 문득 눈 덮인 수풀 사이로 호랑이가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스윽 나타나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뜻한 느낌이 뭉클 솟아오른다. 이 녀석, 아무 사고 없이 돌아왔구나, 안도감이 호랑이를 기다리고 자신을 기다린 세월에 스며들고 눈시울은 붉어진다. 야릇한 감상도 잠시, 안도감을 밀어내고 살아 펄떡이는 긴장감이 심장박동을 타고 서서히 흘러들어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온몸의 모세혈관이 터질 듯 야생호랑이를 영상 기록하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p.273

블러디 메리는 눈 속을 헤매다 기력이 다해 이 자리에 이렇게 누웠다. 누운 채 뒷발로 눈더미를 차고 앞발로는 긁었다. 끊기려는 막바지 숨을 그 뒷발질의 여력으로 몰아쉬었을 것이다. 부릅뜬 눈에 마지막 순간의 안간힘과 고통이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자연이 휴식을 주는 그런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블러디 메리의 이마를 쓸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수염이 뻣뻣했다. 손등을 스쳐가던 전율이 다시 흘렀다. 가만히 눌러 눈을 감겼다. ---p.291

죽은 지 얼마 안 된 듯 몸이 얼지 않고 부드러웠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이 숲에서 오는 것인지 마음속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이 어린 호랑이를 죽였을까? 도대체 왜? 근처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조금 전까지도 이곳에 머물렀음직한 어미와 오빠의 발자국만 널려 있었다. 설마 설백이……? ---p.400

사람들은 호랑이에게서 강렬하고 자극적인 모습을 찾는다. 무방비 상태로 배를 드러내고 뒹구는 모습을 보면 시시해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월백의 가족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이 가슴 떨리는 삶의 절정이다. 암호랑이가 야생에서 새끼들과 뒹굴며 노는 모습은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불 수 있다. 가장 은밀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만 암호랑이는 자신의 내밀한 가정사를 언뜻 보여준다. 지금 나 자신, 자연의 객체로 온전히 녹아들었음을 느낀다. ---p.417

봄을 재촉하는 햇살이 텅 빈 은빛 빙판에 보슬보슬 흩어진다. 그 너머 맨살을 드러내고 빽빽이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옅은 빙무가 걸려 있다. 예부터 호랑이가 살아왔던 우수리의 밀림,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밀림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호랑이는 살아가고 있다. 월백의 어미와 그 어미들이 그래왔듯이 월백의 자식들도 이곳에서 새끼를 낳고 무사히 길러내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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