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한 꿈 - 늑대못 전설이 상징하는 현실과 꿈
[도피안산 일지(到彼岸山日誌)]는 어리석은 민중의 삶과 어설픈 지식인의 이루지 못한 꿈, 이념의 허구, 삶에 대한 체념, 이념과 현실의 충돌, 선악의 모호 등이 상징성을 띠며 뒤엉켜 있다.
주인공의 삶은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늑대못 전설의 연장선에 있다. 인간 세상을 동경하여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암 늑대의 소원은 하늘이 정한 금기를 지켜냄으로써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간 세상은 여인이 된 암 늑대가 꿈꾸어 왔던 그런 아름다운 곳이 결코 아니었다. 늑대 여인은 탐욕과 모략이 가득한 인간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꿈꿨지만, 양반집 아들의 계략으로 남편과 아이마저 잃는다. 늑대 여인의 분노와 원망은 스스로를 포기할 정도로 처절했으며, 결국 그녀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처절한 피의 복수를 한다.
주인공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혁명의 깃발을 들었지만, 그 과정은 동네 주민들의 피였다. 하지만 이것은 상황이 바뀌면서 또 다른 복수를 낳아, 주인공은 동네 주민의 손에 부모와 아내마저 잃는다. 여기서 늑대 여인의 남편은 어리석은 민중의 삶으로, 암 늑대의 꿈은 어설픈 지식인의 이루지 못한 꿈 또는 이념의 허구, 늑대 여인의 복수는 삶에 대한 체념, 늑대 여인 부부의 짧은 행복은 이념과 현실의 충돌, 늑대 여인의 복수는 선과 악의 모호함으로 치환된다.
민중과 함께 했던 삶 ? 실패한 혁명가의 꿈
“나는 어떤 경우에도 땅을 파는 농부가 되고 싶었다. 호미나 쟁기로 흙을 파고 싶었다. 그리고 눈보라 한겨울 동안 초조하게 봄을 기다리고 싶었다. 어김없이 찾아준 그 봄에 감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나를 이곳에 데려왔고, 나를 키워 준 이 땅에서라야 했다. …… 중략 …… 다른 땅에서의 곡괭이질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현실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없던 주인공은 한 여인을 통해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을 만나면서 삶이 바뀌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이 땅의 주인들인 노동자 농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혁명가의 삶을 살고자 한다.
주인공은 ‘농부: 전사 / 한겨울: 민중의 시름 / 봄: 혁명의 상징성 / 곡괭이질: 행동’라는 등식의 가정 아래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마지막 남은 것은“그러나 실상 세상이 거꾸로 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얼마간의 우여곡절은 있지만 세상은 언제나 똑바로만 가고 있다. 우습게도 난 세상이 똑바로 가는데 일조하지 못했다. 오히려 똑바로 가고자 하는 순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라는 회한이다.
[도피안산 일지]는 피안에 이르는 산에서의 기록 그대로, 전쟁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던 좌익 지식인의 뼈아픈 자기 성찰과 회한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