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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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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5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32쪽 | 286g | 130*208*11mm
ISBN13 9791187789383
ISBN10 118778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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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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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의 주인은 어쩌면 어느 날 예고 없이 험윤의 집에 불쑥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시 자신이 여기에 책을 한 권 놓고 가지 않았는지 그에게 물을 것이다.
--- p.16

오래오래 계속되는 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 내 시간은 보이지 않고, 불분명하고, 흐릿할 뿐. 가만히 있으면 나는 밤 속에서 연기처럼 흩어지고 점점 엷어지다가, 아무도 모르게 완전히 사라질 거예요. 아무도 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채로, 그렇게 사라질 거예요. 아주 적은 급료만 받는다 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우리가 갈 초원에서는 돈이 필요하지도 않을 거잖아요. 일이 고생스러울 거라고 말하셨나요? 나는 황홀할 거예요. 슬리핑백에서 자고, 샤워도 못 하고, 화장실도 없다고 말하셨나요? 떠날 수 있다면, 나는 황홀할 거예요. 여기 가만히 있으면 내 밤이 영영 끝나지 않아요. 나를 데려가 주신다면, 나는 황홀할 거예요.
--- p.41~42

삶에는 일순간이 있다.
그 사람의 금이 간 얼굴이 눈을 감은 험윤의 금 간 얼굴을 응시한다. 일순간이 지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등을 보이고 돌아선다. 그 사람은 거울 속에서 멀어진다.
--- p.49

내 생각에, 그래서 나는 마침내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거야, 하고 그날 경희는 나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 나는 영국식 뒷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어.
뭐라구요? 나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물었다.
거긴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었단다…… 담장 안쪽과 담장 바깥쪽에…… 그네와 앵두나무와 꽃들이……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걸 깜빡 잊었지.
뭐라구요?
내 생각에, 너도 그렇게 될거야.
뭐라구요?
내 생각에, 너는 영국식 뒷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어.
--- p.71

그날 경희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내 안에 아로새겨졌다. 내 안의 깜깜한 고대 동굴에 최초의 누군가 횃불을 들고 들어왔고, 그을음과 재, 동물의 기름과 붉은 흙으로 죽지 않는 화려한 벽화를 남겼다. 나는 그것을 굳이 기억해 낼 필요도 없었다. 그것을 바라볼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그냥 그 자체로 내 안에 있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았다. 그것은 나였다. 그것은 내 피부이자 감각이었다.
--- p.80~81

그리하여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 사람이 내게로 몸을 돌리고,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하고 말했을 때, 일생 동안 오직 고요히 침묵만 하고 있던 수백 수천의 작은 종들이 비로소 내 안에서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의 은빛 투명한 나방들이 날개짓을 시작했다. 은은한 울림이 밀려가고 밀려왔다. 격한 파도가 되어 부풀었다가 부드러운 거품처럼 아래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내 안에서 영국식 뒷마당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며 오랜 물 위로 떠올랐다.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영국식 뒷마당으로 들어갔다.
--- p.85~86

경희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경희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경희가 읽고 있는 이야기에 점차 홀려 버렸다. 그것은 이상한 노래 같았고, 여러 가지 동화에서 한 조각씩 가져와 이어붙인 연결되지 않는 만화경 같기도 했으며, 거꾸로 돌아가는 필름 같기도 했고, 미친 여자의 독백, 혹은 잠든 사람의 무의미한 웅얼거림, 혹은 고양이나 뻐꾸기의 울음처럼 이해할 수 없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매료시켰다.
--- p.87

불현듯 나는 알게 되었다. 경희는 오직 자신이 읽고 있는 그 이야기로만 거기 존재한다는 것을. 그 이야기로만 평생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 p.93

나는 울고 싶었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아마도 풍진 탓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경희는 바보일지도 모른다고, 마음 한구석에서 비밀스러운 생각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 p.95

나는 내가 책들의 바다에서 태어나 홀로 표류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 p.116

하나의 트로이 안에 또 다른 트로이가 있고 그 안에는 더 이전의 트로이가 묻혀 있으며 이전의 트로이 안에는 그보다 더 오랜 옛날의 트로이 폐허가 잠자고 있듯이, 그리하여 모든 트로이들이 저마다 더 오랜 트로이로 시간탐험가들을 이끌듯이, 책들은, 문자는, 점점 더 오래된 시간으로 나를 이끈다. 나는 영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을 비밀을 향해서 점점 가까이 다가감을 느낀다. 점점 더 과거인 것을 향해, 점점 더 어떤 특정한 시간을 향해 점점 더 빠르게 수렴됨을 느낀다.
--- p.118

나는 탁자에 혼자 앉아 있다가 머릿속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불안한 글자들을 쳤다. 그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문장이었다. 나는 일생 동안 그런 문장을 써 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밤은
부엉이에게 울음을 주고
이곳에서의 체류는 너무도 불행하므로…….
--- p.130

나는 무한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 어쩌면 나는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위대한 작가나 대단한 작품을 써서 이름이 알려지는 그런 작가가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의 회귀를 기다려온 다락방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그곳에서 홀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작가.
--- p.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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