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와 둘째 모두 등센서가 매우 발달해 손을 제대로 탔다. 1시간을 안고 있다가 바닥에 눕히면 30분도 못 자고 깨버리니 낮잠은 호사였다. 두 돌이 될 즈음까지 낮잠은 30분, 밤잠은 수시로 깨는 생활을 하면서 나의 피로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매일 ‘왜 다른 아이들은 잘 자는데 너는 이렇게 깨니? 도대체 언제쯤 잘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 이런 양가감정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을 때, 많은 엄마는 혼란스러워하고 자책한다. 왜 이렇게 모성애가 부족한지, 참을성이 없는지 자신을 탓한다. 사회는 아이를 미워하는 엄마를 용납하지 않기에 이런 감정을 밖으로 꺼내기 힘들지만 모든 엄마는 때로 좋은 엄마이기도, 때로 나쁜 엄마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런 양가감정은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는 순간부터 해결된다고 말한다. 엄마라는 사람에게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있어도 괜찮다.
--- pp. 28~29
이 ‘열심히’ 한쪽에만 퍼붓는 육아의 패턴을 바꿔야한다. 지금까지 모든 에너지를 아이에게 썼다면, 이제는 육아를 하는 주체인 자신에게 일정 부분을 쓰자. 아이가 어릴 때는 나에게 1만큼의 에너지를 쓸 수 있었다면, 아이가 커갈수록 그 에너지의 비중을 조금씩 늘리자. 아이에게 쓰는 에너지를 줄이는 것을 겁내지 말자. 아이도 엄마의 도움 없이 혼자 무언가를 해보는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일 때 성장할 수 있다.
아이에게 쓰지 않고 남은 에너지는 틈새 시간을 통해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해소하는 데 쓰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부정적인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별일 아닌 일에도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 온다. 넘어져서 다치면 소독해주고 약을 발라주듯, 우리 마음에도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응급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감정도 잘 돌봐주지 않으면 덧나고 짓물러 염증이 생길 수 있다. 이 마음의 염증은 아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 p. 61
마침 그 무렵 둘째가 어린이집에 등원하게 되었다. 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그 시간을 통해 나를 추스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는데 아이는 당연히 엄마가 아닌 낯선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서 지내는 시간을 힘겨워했다. 처음 몇 개월만 지나면 적응하겠지 했던 생각들은 빗나가고 매일 울음을 터뜨리고, 심지어 하원해서도 평소보다 더 떼를 쓰고 불안해하는 모습에 5개월 만에 어린이집을 퇴소했다. 그렇게 세 돌까지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결국, 아이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구나’라는 사실로 마음을 충분히 채운 뒤에야 엄마를 놓아준다. 아무리 엄마가 ‘내 시간 좀 가지자’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밀어내도, 아이의 마음이 덜 채워지면 아이는 엄마의 바지자락을 계속 붙들고 있다. 아이마다 그 마음 그릇의 크기가 다른데, 우리 둘째는 상대적으로 그 그릇이 깊고 커서 안정 애착기에 들어서기까지 엄마의 사랑이 많이 필요했다. 아이의 마음을 채워주어야 결국 엄마가 행복할 수 있다. 그래야 아이가 엄마 아닌 다른 이(아빠, 친척, 선생님 등)와도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비로소 엄마도 숨 쉴 틈이 생기는 것이다.
--- pp. 137~138
순하지 않은 아들 둘을 키우면서 우리 부부에게 ‘훈육’은 항상 고민거리였다. 군인처럼 강하게 말을 해야 아이들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한동안 우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면서부터 역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는 누를수록 튕겨 올랐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엄마는 왜 그렇게 안 하는데?” (…) 많은 심리학자가 이런 강압적 방식의 훈육은 일시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한다. 큰소리로 훈계했을 때 아이는 당장 일어나서 움직이지만, 그것은 이후에 떨어질 엄마의 불호령이 무서워서이지, 아이가 자발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면 아이는 점점 더 강한 통제나 압력을 주어야 움직이게 된다. 장기적으로 아이의 자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훈육해야 한다.
--- pp. 210~211
아이가 아기일 때는 “엄마가 너의 우주가 되어줄게” 매일 다짐했었는데, 아이가 커갈수록 “너의 우주에 엄마가 놀러 갈게”라고 매일 깨닫는다. 이제 잊고 있던 엄마의 우주를 다시 찾자. 어떠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좋아했던 것, 잘했던 것을 돌이켜보면서 나의 정체성을 되찾자는 뜻이다. (…)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엄마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은 인과관계가 아닌 병렬 관계여야 한다. 엄마는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의 행복을 위해 엄마가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틀렸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수동적인 행복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한다. 엄마와 아이의 행복은 원 플러스 원이 아니다.
--- pp. 272~274
어느 저녁 아이의 준비물을 사러 나온 길.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멍하니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가정이라는 퍼즐 안에 딱 들어맞는 평범한 엄마의 모습으로 잘 살고 있는데, 왜 집에 가기가 그렇게 싫었던 건지. 그때 알았다. 나는 우울증의 경계에 있거나 우울증에 빠졌다는 것을.
그 마음으로 썼다. 마음에 있는 우울을 퍼 올려서 그 힘으로 글을 썼다. 우울은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었고, 글은 나의 우울증 치료제였다. 아이들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아침, 혼자 부스스 일어나 타닥타닥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인 나의 마음이 누군가에게도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 pp. 28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