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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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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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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7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84g | 148*210*8mm
ISBN13 9791158965204
ISBN10 1158965206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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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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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마지막 시접을 접어 공그르기를 끝내면
혓바닥 밑에서 아늘거리던 말문이 트인다

채널마다 매화 만발

그 꽃 다 지면 무슨 재미로
그러다가 살구꽃 피고 지고
또 그러다가 명자나무 넌지시 부풀 텐데
아마도 서부해당화 옥매화 손잡고 번질 텐데
봄의 해례본이 만장일치로 펼쳐질 텐데

설마 분홍,
제발 분홍,
아무쪼록 분홍, 분홍
실로 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한 꽃 기별이 오갈 터

돌 틈마다 사이 사이의 감정들이 무릎 꿇고 풀꽃 편지를 쓸 텐데

지금은
야행성을 가다듬고 발치에 누워 갸릉거리는 고양이의 얄미운 시간이거늘

밑줄 그어진 한 행의 서정시이거늘

사실 그대로 아주 수식(修飾)의 봄밤이거늘
--- 「부사(副詞)로 엮은 봄의 해례본」 중에서


흑청색의 타투가 새겨진 오른쪽 어깨가 물결무늬로 출렁거리면
달빛은 지느러미를 통과한다

한때 빛났던 흔적들

차라리 그리워했다고 말할 걸 그랬다

눈물이 눈시울까지 당도하는 것보다 빙하기가 빨랐다

뜬눈으로도 볼 수 없는 세상
낭만과 달빛을 버리니
꿈이 한층 가벼워졌다

헷갈리는 기적과 애매한 운명 따위를 믿지 않기로 하면
이런, 자꾸 쏟아지는 졸음을 어쩌나

뭍이 가까워질수록 기도의 시간이 줄었다

그의 눈물처럼 오래된 사랑처럼
이별은 늘 뜻하지 않게 와 있었다
--- 「고등어」 중에서


분홍 꽃잎을 열면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요
꽃잎을 닫으면 당신의 목소리는 사라지죠
색깔이란 그런 거예요
빨강은 빨강의 방식대로
분홍은 분홍의 방식대로
빨강이라 생각하면 빨강이 되고
분홍이라 생각하면 분홍이 되는 거죠
어제 분홍을 물고 날아간 새가 오늘은 돌아올까요
떠난 바람이 분홍 깃을 꽂고 돌아온 것처럼요
어쩌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누군가 말하겠지만
날개 있는 것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날개를 숨겨두었죠
다음 생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다가 문득,
뒤꼍 살구나무에 기대어 눈 감고 열까지 세고 나면
대숲에 알 낳은 암탉의 울음 외에는 온통 텅 빈 세상
그 아련했던 적막이 떠올라요
오! 흐르지도 젖어들지도 못하는 나는 어쩌죠
그래도 괜찮아요
오월이 가고 유월이 왔으니까요
살구나무 옆에 자귀꽃 피었으니까요
분홍 꽃술을 만지는 살가운 바람의 손길 있으니까요
--- 「살구나무 옆 자귀꽃」 중에서


석양이 다녀가자 당신의 눈동자에서 바다가 사라졌다

한껏 번진 노을은 흰 구름을 밀어 올렸고
밤안개는 저녁을 밀쳐내고
달빛을 낳았다

컹컹 어둠이 짖는 소리에
개밥바라기별이 눈을 뜨고
소쩍새는 소나무 숲을 헤치고 내려와
물고 있던 일곱 개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라진 고양이처럼
카시오페이아가 사라져버린 밤
비행기가 자주 행성을 물어 나르면
당신의 눈동자에 갇힌 별이 글썽거렸다

빛나는 것들의 움직임에는 이유가 있는 법

그 여름의 사랑처럼
숨을 오래 참으면
별빛은 물결무늬로 심장을 향하고
초승달을 기다리는 당신의 눈동자는
다시 푸른 바다로 출렁거렸다
--- 「눈동자에 갇힌 별」 중에서


나비가 될까 꽃이 될까
갈림길에 서 있었던 적 있었다

꽃이 되었으므로
화려와 순수 사이의 갈등을 버렸다

노을의 속성과 소멸을 뛰어넘으면
불멸이 되는지

그 어떤 말, 그 어떤 문장으로도
영원을 붙잡을 수 없을 때
쏟아지는 노을의 안쪽을 걸었을 것이다

몇 세기를 삭제시켜도
꽃은 꽃이어야 하므로
영원이어야 하므로
제 스스로 갇히는 무늬가 되었다

저, 시린 청초
빗금 하나 없는 봉인

영원을 가두는 풀꽃의 방식이다
--- 「청화백자초화문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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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구사가 뛰어난 박숙경의 시는 작은 풍경의 조각들로 곱게 기워진 서정의 조각보이다. 풍경은 시의 내용이자 형식이고, 시어이자 행이고 연이며 시의 근본이다. 그녀의 “말을 찾고 말을 깁는 과정의 기나긴 궤도진입”을 지켜보았던 어느 시인은 시인의 시를 일컬어 “활짝 핀 화단의 꽃”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화단에 핀 꽃과 서정의 조각보가 가진 공통점은 섬세함에 섬세함을 더한 아름다움에 있다. 시인은 사색하며 소요하는 산책자가 자신이 수집한 작고 하얀 조약돌, 반짝거리는 사금파리, 어여쁘고 소박한 풀꽃 등을 하나하나 꺼내놓듯, 수채화처럼 투명한 풍경의 조각들을 차례로 병렬한다. 이 병렬된 조각들은 유기적이다. 수놓는 여인이 “시접을 접어 공그르기”(「부사(副詞)로 엮은 봄의 해례본」)를 하는 특유의 감각과 세심함으로, 시인은 풍경의 조각들을 하나의 구김살도 없이 매끄럽게 바느질한다.
- 신상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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