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언가에 대해 쓴다는 건 그 무언가를 아주 깊이, 아주 많이 사랑하는 일이다. 혼자 알고 있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일이며 함께 손뼉 치며 공감하고 싶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무언가에 대해 쓰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가장 극진한 사랑 고백이며 연애편지가 된다.
--- p. 20
2.
생각해보면 어떤 곳을 방문하기 딱 좋은 날씨에 딱 맞는 상황, 딱 좋은 사람이 있던 경우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직 나를 북돋운 건 단 하나! “갈까? 가자!” 두 단어였다. 맹목적 의지라 불려도 무방할 감정이지만, 내겐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 어떤 이유로도 막을 수 없는 확고함이나 다름없었다. 이쯤 되면 “여행에 미쳤다”는 표현도 과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 p. 29
3.
인간이 만든 문명을 보며 지식을 키웠던 시기가 있었다. 언제쯤부터였을까? 인간이 만든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그것이 아무리 대작이라 할지라도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자연 탐험을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힘든 만큼 더 단단해지고, 땀 흘린 만큼 충전이 되는 여행은 대자연을 직접 발로 밟는 일이었다. 겨울엔 스키 천국으로, 여름엔 트레킹 천국으로 변신하는 알프스의 심장, 북이탈리아 돌로미티 트레킹. 신이 만든 조각품 속을 걸으며 매순간 아낌없이 기쁨을 느꼈다.
--- p. 72
4.
중앙광장 앞에 있는 커다란 야외 레스토랑이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제법 시끌 했다. 특별한 치장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틈에 앉아 고조 섬에서 생산한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나도 터억, 잠시 긴장을 풀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진지하고 투쟁적인 나라에서 온 여행자에게 몰타는 삶이 매사 그렇게 진지하고 투쟁적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 p. 99
5.
빙하에서 내려온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온종일 생명체 하나 보이지 않는 텅 빈 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멈춰 선 목장에서 꼬물꼬물 뛰어 노는 양떼라도 만나면 새삼 생명의 강인함에 감탄이 터져 나오는 곳. 다시 차를 몰다가 시원하게 수직으로 내리 꽂는 폭포 옆으로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무지개를 만난 순간, 사는 동안 이곳에 발을 디뎌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던. 아이슬란드는 물과 불 그리고 야생의 땅이었다.
--- p. 112
6.
이탈리아 건축가 렌초 피아노(Renzo Piano)는 영국이 특별히 아름다운 건 천천히 시간을 갖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축물도, 공원도, 문화 예술도, 시장도 그러하다. 오랜만에 방문해도 얼마나 변했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도시들이 있다. 영국도 그렇다. 11년 만에 다시 찾은 런던은 매 순간 매일의 삶을 통해 결코 날림 없이 견고하게 지어지고 있었다. 시간의 공을 들여 만든 것이야말로 오랫동안 사랑받을 자격을 얻게 되며 세계를 이끄는 고전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역사와 현재가 반짝반짝 빛나는 곳에서 한 해 동안 수고한 자신에겐 축하와 격려를, 다가올 새해에도 함께할 사람들과 감사와 축복을 나누는 시간을 누리는 건 어떨까. 영국의 겨울은 말 그대로 마법 그 자체이다.
--- p. 146
7.
볼리비아의 자연은 거칠고 투박했지만, 곳곳에 반짝이는 보석들을 숨겨놓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는 중이라면 더는 미루지 말고 떠나길 바란다. 코로나를 겪으며 우린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소금 사막의 광활한 풍경 앞에 서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 p. 178
8.
선사 시대 이후 20억 년에 걸쳐 지구의 역사를 아로새긴 그랜드 캐니언은 미국 서부의 협곡 무리 중에서도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다. 지각 변동에 의해 일대가 융기하면서 형성된 협곡은 지금 이 순간에도 침식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늘에서 보면 붉은색을 띠는 협곡이 마치 거대한 용이 꿈틀대는 것 같은 형상이다. 땅도 숨을 쉬는 생명체라는 사실이 감각적으로 와 닿는 순간이다.
--- p. 188
9.
마을에 들어서자 물담배 시샤를 피는 남자들이 평화로운 얼굴로 여행자들을 반겼다. 물놀이를 하다 나온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이 마음의 때를 다 씻어주는 듯하고, 이국적인 여인의 미소가 싱그러웠다. 선생님으로 보이는 누비안이 나를 교실로 안내하더니 자기네 언어로 내 이름을 써주었다. 으리으리한 고대 신전도 좋지만 현지인의 삶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동네 탐험이 더 좋다. 오래 남는 기억은 여행 책자에 나오는 명소보다는 이름 모를 어느 골목에서 만난 현지인의 표정일 때가 더 많았다.
--- p. 219
10.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속에서 우린 즐겁게 살아남았다. 힘들고 거친 환경 속에서도 서로 웃음을 나누고자 한다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여행은 편견, 완고함, 편협함에 치명타를 날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여행이 몹시 필요한지도 모른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광범위하고 건전하며 너그러운 견해를 평생 지구의 한 작은 구석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마크 트웨인이 말이 떠오르는 날들이었다.
--- p. 244
11.
살면서 마주친 베스트 일출은 모에라키 보울더스(Moeraki Boulders)에서였다. 바다 위에 거대한 공룡의 알들이 떠 있는 듯한 이 해변은 무려 6천만 년 전 복잡한 지질학적 자연현상으로 형성된 것이란다. 밀물과 안개 때문에 은하수는 좀 아쉬웠지만, 일출은 마치 다른 세상의 빛을 보는 것처럼 황홀했다. 이런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생각한다. 지구상엔 풀리지 않는 신비가 참 많다고.
--- p. 262
12.
노을이 지고 칠흑 같은 밤이 깊어지자 별이 쏟아지더니 어느새 여명이 밝아왔다.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구상에 몇 곳이나 될까? 짜릿한 볼거리를 원하는 사람에게 몽골 여행은 허무에 가까울 수도 있으리라. 온종일 초원과 구릉을 달려 게르에 도착한 뒤 작은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일, 게르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일, 바람의 소리를 듣는 일, 그것이 전부니까. 그러나 복잡한 삶의 시간을 멈추고 단순한 야생의 삶을 느껴보는 시간을 기대한다면 몽골은 최고의 여행지다.
--- p. 301
13.
녹색 잔디가 폭신하게 깔린 길을 걷다 보니 갑자기 만년설이 덮인 바위산이 나타났다. 그 앞에 고급 인테리어 가게에나 있을 법한 소파가 마치 광고의 한 장면처럼 놓여 있었다. 일행 중 몇은 호수까지 가보겠다며 서둘러 떠났고, 난 멋진 소파에 앉아 이 비현실적인 풍경을 홀로 즐기기를 택했다. 느긋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 주변을 360도 파노라마로 돌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머물고 싶은 느낌!이 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시간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위해 충분히 오래 머물다 간다”고 했던 말의 뜻을 그제야 제대로 실감했다.
--- p. 316
14.
남들이 가지 못한 곳을 가보고 나면 조금은 더 완전한 내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매번 힘들어하면서도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조금 더 멀리’를 꿈꾸게 된다. 파키스탄의 라호르, 이슬라마바드, 탁실라, 미나핀을 지나 여행자의 로망 훈자까지. 국경 마을 소스트를 지나 중국의 파미르 고원을 넘어 카슈가르까지. 이름조차 낯설기만 했던 장소들이 이제 조금은 익숙한 얼굴로 다가온다. 어느 날 문득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이들 지명이라도 보고 듣는다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울 것 같다.
--- p. 337
15.
배가 부르니 그제야 식당 안의 독특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각각 혼자서 식사하는 노인, 막걸리처럼 보이는 차를 마시는 호탕한 두 여인의 모습이 인상 깊어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늘 실감한다. 세상 어느 풍경보다 아름다운 건 사람이라는 것. 현지인의 얼굴엔 그곳의 역사와 풍경이 모두 담겨 있다.
--- p. 374
16.
가끔 내가 사는 이 도시의 단어는 오직 money, money, money 라는 생각에 좌절할 때가 많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하다 잠시 한국에 들른 친구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말도 그랬다. 프랑스에서 온 친구도, 스웨덴에서 온 친구도, 호주에서 온 친구의 딸도 이 도시에선 눈을 뜨자마자 날씨나 인생 이야기가 아닌 오직 주식, 부동산, 보험 같은 얘기만 하는 것이 기이하다고 했다. 나 또한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들과 비슷한 심정이 되곤 했다. 그것이 포화 상태가 되면 어디로든 서둘러 떠나곤 했던 것 같다.
--- p. 394
17.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답답한 적이 많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정성을 다하는 마음, 예의바름과 친절함은 치앙마이 생활을 내 집처럼 느끼게 해준 가장 확실한 힘이었다. 카페도 밥집도 3시면 문을 닫는 곳이 많고, 몇몇 곳을 제외하면 허름한 가게나 유명 가게나 음식 값이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받을 만큼만 받고 필요한 만큼만 벌뿐 욕심을 내지 않는 삶.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며 워라벨을 실천하는 사람들. 연말 대목에도 가족과 함께하느라 마사지사가 집에 가고 없는 곳. 치앙마이를 설명하는 두 개의 말이 있다. 사바이 사바이(천천히 천천히), 마이 밴 라이(괜찮아요)!
--- p. 405
18.
어딜 여행하든 샅샅이 뒤지고 다니기보다 느슨하게 나만의 느낌대로, 발길 닿는 대로 한두 군데의 포인트만 여유 있게 즐기는 편이다. 삶의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이건 나만의 여행 방식이며 각자 삶의 방식이 다르듯 여행법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먼 훗날 이날들을 어떻게 추억하게 될까, 잠시 생각해본다. 다행히 꽤 좋았던 치유 여행으로 기억될 듯하다. 아름다운 하루하루가 축적되고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의 삶이 만들어진다는 내 믿음이 맞는다면 말이다.
--- p. 448
19.
여행이 주는 기쁨은 이런 것이다. 뜻밖의 만남, 의외의 발견. 세렌디피티! 영화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전혀 다른 도시를 걷다가, 맞닥뜨리게 되는 무한한 연결들. 그 연결의 기쁨이 여행이다.
--- p.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