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회권이 있은 지 사흘 뒤에 정약용 혼자 한림소시에 다시 뽑혔다. 따라서 과거에 급제한 지 1년도 채 안 돼 예문관에 들어가게 된 셈이었다. 이기경은 바로 이것을 꼬투리 삼기로 마음먹었다.
우상 채제공은 사정에 얽매여 법식을 어겼습니다. 더구나 정약용은 예문관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천주학을 신봉하는 자로서 그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가 어찌 국가의 기초가 되는 예문관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소를 읽은 정조는 몹시 화를 냈다.
"우상, 어찌 된 연유인지 설명해보시오."
"황공하여이다. 신은 공정히 권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상소가 들어온단 말이요?"
이 당시 정조에게 있어서 천주교란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아끼는 제목인 정약용이 이제 막 입신하려는 터에 중상하는 무리가 생긴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14년 간의 통치 경험으로 상소건을 그냥 덮어둔 채 감싸면 반드시 큰 부작용이 따르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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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거리는 비만 오면 질척거렸다. 좁은 골목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물이 잘 빠지지 않고 늘 그대로 고여있기 일쑤였다. 내리는 듯 마는듯한 가을비가 겨우 반각쯤 뿌렸을 뿐인데 골목길은 어느새 진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발놀림을 해도 척척 달라붙는 진창을 피할 도리가 없고 짚신사이로 기어드는 흙탕물은 버선을 흠씬 적셔 놓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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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앞가림이나 잘할 것이지 과거공부하다 말고 소목장이 먹고 사는 걱정을 도맡았더라 말인가?'
'형님. 아버님께서도 지식만을 쌓기 위한 학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끼니도 굶기 일쑤인 백성들 위에 앉아서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정사를 하려고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옵니다. 당장 한지붕 밑에 사는 식솔의 일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과거에 급제하면 무엇하겠으며 그런 사람이 올바른 목민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p.15-16
'기계라야 한다. 한꺼번에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내는 기계가 있다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우선 기계를 만들자.'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약용은 기계를 만들 궁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인 천만호는 약용과 나눴던 이야기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약용의 권에 못이겨 홍씨가 나눠준 때거리로 몇 끼를 때우고 나더니 다시 일감이 들어오자 언제 근심이 있었냐는 듯이 명랑해져서 열심히 대패질을 해댔다.
--- p.15
'그대는 내 마으을 나는가 ?' 어의를 읽은 약용이 황송해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약용 역시 정조의 마음을 헤아렸는지라 한으로 뿌리박힌 기나긴 풍상의 한 세월을 몸소 겪은 듯한 회한에 젖어들어 있던 터였다. '부디 성군이 되옵소서' 약용의 황송해 하는 몸짓을 지그시 바라보던 정조의 표정에 한줄기 바람처럼 어두운 그늘이 스쳐갔다.'성군의 길은 무엇이고 현신의 길은 무엇인고. 언제까지고 정녕 그대와 더불어 정도를 걸을 수는 엇는 것인가?'
--- pp. 292-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