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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 진연주 소설집

리뷰 총점9.0 리뷰 2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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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51쪽 | 264g | 124*188*15mm
ISBN13 9788932040301
ISBN10 89320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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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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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정오다. 오후가 얼마 남지 않았다. 너는 오후만 되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시간, 오후. 긴 설명 없이도, 그렇다고 짧은 설명이 필요한 것도 아닌 채로 그것을 이해한다. 꺾이는 시간, 내려가는 시간, 저무는 시간, 미지근한 시간, 반추의 시간. 매일매일이 더 나빠진다고 너는 말했다. 견디기 힘든 꿈만 계속된다고 말했다. 낙담이 평온하다고 말했다. 기다릴 때마다 오는 것들이 멈추고, 사실 기다림이란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되는, 그만큼 미련하고 소모적인 것은 아닐까 너는 말했다. 지금은 좀 앉아 있고 싶다.
--- 「떠도는 음악들」 중에서

어머니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집 안을 정돈했다. 있을 것들이 있을 자리에 있었고 없어야 할 것들은 없었는데 모든 일에는 예외가 따르는 법이어서 없어야 할 것이 있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나는 없어야 할 것 중 하나였다.
내게 배꼽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를 잉태한 적 없고 나를 낳았다.
--- 「없어야 할 것이 있게 되는 불상사」 중에서

아무의 말을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거기에 어떤 해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떤 실마리라도 있는 것처럼. 나는 아무라는 캔버스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본다. 아무라는 캔버스에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는 나를 본다. 아무라는 행간에 오래, 가만히 앉아 있어도 불꽃을 일으킬 수 없고 불꽃이 일지 않으니 아무를 내 안에 들이지도 못하는 나를 나는 바라만 본다. 나에게는 없고 아무의 엄마에게는 있는, 부싯돌.
---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아무」 중에서

와, 흰 벽돌담 많네? 나는 공간을 둘로 나눠 한편에 배변 패드로 줄담을 만들었다. 막돼먹은 놈처럼 아무 데나 오줌을 싸지 말라는 유순한 압박이었는데 더 늙은 개는 자기만의 방식을 따로 개발해 나를 놀라게 했다. 이부자리에 편안히 누워 오줌을 눈 다음 끼앵끼앵 나를 부르는 식이었다. 좋았다. 하루에 몇 차례쯤 이부자리를 빨면 그만이니까. 늙은 데다 백내장에 신부전 환자이기도 한 나의 늙은 개가 다치지 말고 시원하게 오줌 싸는 삶만 살았으면 했으니까. 어쩌다 배변 패드에 오줌을 누게 되면 나는 말했다. 천재 아니야? 천재네. 천재 맞네.
---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중에서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생에 있어 가장 격렬한 사건은 타의에 의해 결정된다. 남녀의 노골적인 환락의 밤이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한 생산의 밤에 우리는 잉태된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손이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에 있어 가장 큰 사건에서는 언제나 소외된 채 존재했던 것이다. 그 중간의 사소하고 남루한 생의 업적들만이 우리의 것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붙든 채 해야만 하는 자의적 또는 자발적 선택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그들만의 네버랜드로 이끌 확률은 얼마나 될까.
--- 「구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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