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쌓아놓은 박스를 보며 어머니가 투덜거렸다. 수정은 먼지 묻은 손을 털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짐이 많은 게 아니라 혼자 하려니 더뎌서 그런 거예요.”
“도와 달라 이 소리야?”
“엄마는 딸이 분가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수정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외국으로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럼 울기라도 하리?”
“치.”
“다 늙은 엄마 시키고 싶니? 김 서방 오라고 해.”
“엄마가 사랑하는 김 서방은 자기 짐 챙기고 있죠.”
“그러게 이사를 왜 같은 날 해? 따로 따로 하면 되지.”
그러더니 어머니는 뒷짐을 지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정은 심술 난 표정으로 안방 문을 쏘아보다 포기하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잔뜩 어질러놓은 방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둘 다 일이 너무 바빠 합가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제야 부랴부랴 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지 몰라서 게으름을 피웠던 것도 있다. 하지만 하나둘 짐을 꺼내다 보니 이삿짐센터를 불러야 지경이 되었다. 점심 먹은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배도 고팠다.
“으?!”
두 주먹을 불끈 쥔 수정은 힘찬 소리를 내며 책꽂이로 향했다. 책은 나중에 천천히 옮길 계획이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책들만 먼저 챙기기로 했다.
책을 골라 바닥에 내려놓던 수정은 책꽂이 제일 아래 칸에서 두툼한 클리어파일을 발견했다. 색깔이 바랜 것이 꽤 오래전 것으로 보였다. 궁금한 표정으로 클리어파일을 꺼내 들쳐보는 수정의 얼굴에 반가움과 놀라운 기색이 빠르게 번졌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주고받던 손편지였다. 그때는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는지 같은 반이었으면서도 아침저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었다. 편지는 경선이와 미선이가 보낸 것이 제일 많았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편지들도 꽤 되었다. 수정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걸레로 먼지를 닦아내고 편하게 앉아 편지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몇 통을 읽어보았지만 글씨는 삐뚤빼뚤에다 무슨 사연으로 이런 편지를 썼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편지 하나에 눈길이 머물렀다. 경선이가 보낸 편지였는데 그 속에 현호의 이름이 있었다. 날짜와 내용을 대충 보니 스카우트 야영대회를 다녀온 후에 보내 온 편지로 추측되었다. 아마도 자신의 편지를 읽은 경선이 답장으로 보내 준 것 같았다. 무슨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수정은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뭐지? 뭐지?”
수정은 엄지손톱까지 물어뜯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야영대회는 딱 하나다. 야영 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 때문에 고생을 했던 바로 그 야영이다.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공지를 듣고 조 대원들과 대피를 위해 짐을 싸던 것과 긴 줄을 서서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던 바로 그 야영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수정은 이삿짐을 싸던 중이었다는 것도 잊고 경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긴 수다가 한참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