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죽을 것 같았지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죽어라 달려서 도착한 곳은 우습게도 예지네 집 앞이었다.
좋았던 추억 하나 없고, 한 번도 내 집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이곳으로 오다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장 갈 곳이, 도움을 청할 사람이, 새봄에겐 없었다.
문 앞에서 서성이던 새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불행히도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어 록을 터치해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비비빅.
짧은 경고음이 났다. 역시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어떡하면 좋을지 막막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던 그때.
쾅, 하고 문이 열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새봄의 시야에 슬리퍼를 신은 남자의 커다란 발이 보였다.
“저…… 아,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허리까지 숙여 인사를 한 새봄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예지 오빠분 되시죠? 저는, 그러니까 저는, 예지 친군데요.”
땅을 보고 말하던 새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절박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름은 신새봄이고요. 혹시 예지한테 제 얘기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제가 누구냐면…… 전에 여기서 예지랑 같이 살았던…… 어?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새봄이 말끝을 흐렸다.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매우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네?”
“여긴 왜 왔어.”
남자의 차가운 말투. 이 또한 어디서 들어봤던 목소리다.
새봄은 다시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공포에 질려서인지 뚜렷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사이 새봄의 몰골을 마주한 석경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 늘어난 티셔츠를 붙잡고 있는 여자애는 흙투성이 맨발에 젖은 머리카락, 처연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몹쓸 짓이라도 당했는지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새봄을 응시하던 석경은 애써 무심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석경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쾅, 하고 닫혀 버렸다.
잡으려던 문을 놓치고 만 새봄은 허공에 손을 올린 채 벙찐 얼굴로 그저 닫힌 문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안 들어와?”
“네?”
문을 잡고 삐딱하게 서 있던 석경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라고.”
그는 또 아까처럼 혼자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그 바람에 또 쾅, 하고 닫히려는 문을 이번에는 새봄이 재빨리 잡았다.
살금살금 거실로 들어간 새봄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내부 인테리어를 둘러보다가, 문득 예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근데 그 오빠 여자 엄청 밝혀.’
역시 이곳도 안전하진 않겠지? 혹시 더 위험한 곳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을 때, 새봄의 머리 위로 뭔가 묵직한 게 덮였다.
처음 이곳의 문이 열렸을 때, 이 남자가 나타났을 때부터 나던 향기.
새봄은 직감적으로 지금 몸 위에 덮어진 건 누군가의 옷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에서부터 허벅지까지 덮어 버린 카디건의 따뜻한 감촉이 살갗에 닿자, 긴장이 눈 녹듯 녹아내려 결국 울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살기 위해 내달리던 다리마저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린 새봄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울음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울었냐?”
다정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온기.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 두려웠던 마음이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새봄은 불쑥 말을 꺼내고 말았다.
“저 좀 여기서 다시 살게 해 주시면 안 돼요? 방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