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남는 건 사랑 이야기야. 다른 이야기들은 희미해지고 흩어지더라. 로맨스만이 유일무이한 거라고.
--- p.18
재화씨, 재화씨는 왜 장르를 써? 얼른 재등단해. 쉽잖아. 적절한 주제에 대해 모나지 않게 쓰면 돼.”
그때 재화는 상처를 받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었는데, 그건 앞으로도 부적절한 주제에 대해 모나게 쓰리라는 날카로운 예감 같은 것이었다. 용 같은 것 말고, 좀더 부적절한 이야기를 써야지. 모두 입을 모아 부적절하다고 말할 만한 이야기를.
--- p.19-20
친밀감이란 기분 좋은, 심지어 약간 맛있는 냄새가 나는 향초 같은 것.
--- p.31
“한 사람을, 모두는 무리지만, 한 사람만은 행복하게 해줄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쓰지 못하는 건 슈퍼 파워가 있는데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에요. 내 슈퍼 파워를 선이씨를 위해 쓰게 해줘요.”
--- p.33
턱밑까지 찰랑찰랑하다가 버틸 수 없어 쏟아지고 마는 그런 고백 같은 것들, 너무 멀게 느껴졌지만 세상에 아직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 p.34
재화와 함께 있었을 때를 떠올리자면, 가끔 재화가 용기를 보고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덧니만이 이 세계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개 같은 얼굴을 뚫고 단단하게 올라오던, 보석 같은 덧니.
--- p.50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 p.52
재화는 용기의 좁은 세계, 그 건강하고 건전한 세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전남친을 자꾸 죽여버리는 짓, 이제 그만하고 싶지만.
--- p.63
여성들이 연애를 계속 선택하는 이유는 사실 감정 때문이 아니라 안전 때문 아닐까, 그늘에 도사리고 있는 범죄자들의 타깃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기 위해…… 사실 용기를 가끔 그리워하는 것은 용기와 있을 때 누구도 재화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그럼 용기가 그리운 게 아니라 안전했던 상태가 그리운 것일 뿐일 텐데.
--- p.89
때때로 인생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고, 엉뚱한 것이 주어지는데 심지어 후자가 더 매력적일 때도 있다. 그렇게 난감한 행운의 패턴이 삶을 장식하는 것이다.
--- p.90
어쩌면, 하고 재화는 엎드려 얼굴을 묻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이어져 있는 걸지도 몰라. 성층권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냄새 나는 연기들로부터 안전한 높은 하늘에 우리가 이어져 있는 어떤 망이나 막 같은 게 있는 걸지도. 텔레파시랄 것까진 없지만, 내가 널 오래 생각하면 너도 날 잠시쯤은 생각해줄지 모른다는 가능성.
--- p.94
옛날 사람들처럼 편심片心, 촌심寸心, 단심 같은 단어들을 쓸 때마다 지잉, 하고 뭔가 명치께에서 진동하고 만다. 수천 년 동안 쓰여온, 어쩌면 이미 바래버린 말들일지도 모르는데, 마음을 ‘조각’ 혹은 ‘마디’로 표현하고 나면 어쩐지 초콜릿 바를 꺾어주듯이 마음도 뚝 꺾어줄 수 있을 듯해서. 그렇게 일생일대의 마음을 건네면서도 무심한 듯 건넬 수 있을 듯해서.
--- p.101
사랑하지 않아야 잘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 p.114
“미안하다, 집 한 채 못해주고.”
“에이, 엄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집은 됐으니까 안 쓰는 전기담요 있으면 하나만 주라.”
그러자 갑자기, 엄마가 눈을 번뜩였다.
“이불 속에 남편이 있으면 하나도 안 추운데!”
“……그렇게 물건 하나 장만하라는 식으로 말해도 소용없어.”
--- p.135
나는 오늘도 네 좌표를 알지 못해. 우리의 좌표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알지 못해. 네가 나빴는지, 내가 나빴는지, 우주가 나빴는지 알지 못해.
--- 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