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다. 화장실 벽에 비닐을 붙이면서 그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타일이 원래 이렇게 하얬나?
---「첫 문장」중에서
똑같은 일. 똑같은 밤. 그는 1년 전 느꼈던 기분과 감정을 헤아렸다. 해보자.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건 떨고 있는 사람의 몸이 아니다. 체온, 혈관, 뼈, 근육이 있는 사람의 몸도,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도 아니다. 그냥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장난감이다. 분해할 수 있는 장난감. 그의 입꼬리가 순간 차갑게 경직되었다. 그래, 이렇게 하는 게 맞아.
--- p.10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두청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23년 전에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에게 죽음은 오랫동안 갈망해 온 귀로(歸路)였다.
--- p.74
운전석도 바깥만큼 차가웠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쥔 채 앞에 있는 버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월 7일, 오전 9시 1분.
악마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 p.92
쳐요. 죽도록 패 버리세요! 마졘은 말없이 주시하고 있을 뿐 지쳰쿤을 말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지쳰쿤은 쉬밍량의 어깨를 잡아당겨 자기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 p.188
걸쭉한 이 어둠이, 말없이 서 있는 이 건물이, 그 사람이, 그가 들고 있는 물건이 바로 지옥이었다. 뤄사오화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왼손으로는 손전등을 꼭 쥐고 오른손을 허리춤에 갖다 댔다. 눈앞에 있는 어두운 밤이 삽시간에 천지를 뒤덮었다.
--- p.210
유백색 타일 바닥, 누레진 플라스틱 샤워 커튼, 황동 손잡이로 된 샤워기. 얼굴을 덮쳐 오는 달콤하면서도 비릿한 냄새. 그 여자들이었다.
--- p.264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짐승 같은 새끼를 찾아내야 해! 반드시 찾아서 본인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전부 치르게 해야 해! 설령 그게 23년이나 늦은 형벌일지라도!
--- p.346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비극을 겪으면 잊는 쪽을 선택해요. 제가 만난 당사자들도 다 그랬죠. 쉬밍량의 모친까지도요.” 두청이 지쳰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아니잖아요. 여전히 23년 전 기억 속에 머물고 있죠. 어쩌면 당신에게 잔인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난 그래도 당신이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제가 원하는 걸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 p.391
죽이자. 손가락 하나만 당기면 돼. 죽이자. 이놈은 여기에서 여자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사체를 도시 곳곳에 쓰레기 버리듯 내다 버렸어. 죽이자. 이놈 때문에 무고한 청년이 억울하게 사형당하고, 죽어서도 살인범의 누명을 씻지 못하게 됐잖아. 죽이자. 나와 동료들이 평생 치욕을 입고 감옥에서 썩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p.436~437
“라오지, 실수한 적 있으시죠?” “어?” 지쳰쿤은 웨샤오후이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당연하지.” “누구에게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책임질 기회는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 p.598~599
내가 변했나? 그래. 지난 몇 개월 동안 가장 어두운 죄악, 가장 강렬한 감정, 가장 잔혹한 범인, 가장 용감한 경찰을 경험했으니까. 웨샤오후이도 변했어. 혼자만의 비밀이 생겼으니.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 p.649
― 전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생각했어요. 라오지한테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마주할 기회를 드려야 한다고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웨샤오후이는 천사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미소를 지었다.
― 어쩌면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게 바로 저의 집념이에요.
--- p.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