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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 잔혹사
중고도서

조선 임금 잔혹사

: 그들은 어떻게 조선의 왕이 되었는가

조민기 | 책비 | 2014년 04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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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 예정일 미정
쪽수, 무게, 크기 368쪽 | 492g | 152*223*30mm
ISBN13 9788997263752
ISBN10 8997263757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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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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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력한 후보 세 명이 왕위를 계승할 차기 임금 물망에 올랐다. 당시 16살이던 월산대군은 왕위에 오르기에 적당한 나이였고 세조의 장손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실제로 월산대군은 세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손자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의경세자와 소혜왕후 한씨의 차남 자을산군은 왕위 계승 서열 3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정희왕후(세조의 왕비)는 제안대군이 어리고 어리석으며, 월산대군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자을산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최후 교지를 내렸다. 놀라운 일은 예종이 사망할 당시 자을산군은 이미 궁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을산군은 정희왕후의 교지가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즉위식을 올렸는데 그가 바로 조선 역사상 선왕이 세상을 떠난 당일에 왕위에 오른 유일한 임금, 성종이다.
성종의 혼인은 정희왕후와 한명회 사이에서 맺은 일종의 결탁이었다. 한명회의 보호를 받는다면 왕권의 안전은 지킬 수 있었고, 한명회는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다시 한 번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중략…)
신하들은 자신들이 직접 가르친 임금을 자랑스러워했고 사랑하였으며 존경하며 애착을 느꼈다. 즉위 후 10년 동안 성종은 모범적이고 훌륭한 학생으로서 학문에 매진하였고 이러한 태도는 신하들의 학문적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학문이 융성한 시대를 일구었다.
성종이 지닌 리더십의 진정한 면모는 바로 이처럼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의 총명함과 열정적인 성격 그리고 후천적인 노력에 있다. 신하들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학생으로 임금의 역할을 시작한 성종은 조정 신료 대다수와의 관계에서 ‘충(忠)’을 넘어 각별하고도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은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성종을 무한 사랑하며 칭송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략…)
태평성세에 왕은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고 리더십은 오히려 퇴보하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기 마련이다. 성종의 뛰어난 점은 태평성세에 안주하지 않고 훈구 공신이나 사림을 적절하게 기용함으로써 꾸준히 정비해온 제도를 완성하고 조정 전체에 학구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이다. 훈구 공신들은 특혜에 안주하지 않고 긴장하면서 국정을 운영하였고, 사림들은 훈구 공신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성종을 ‘성리학 군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성종은 태평성세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제도를 완성하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훈구 공신 세력과 사림이 공존하는 시대를 열었던 성종은 단 한 번도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신하들 사이에서 잘못이 불거져도 그는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며 지엄하고도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임금의 행동이 도를 넘지 않았기에 신하들 역시 상소와 비판을 하면서도 도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불안하고도 우아한 공존이었다.
_역사가 사랑한 성군의 두 얼굴, 성종

이렇듯 연산군은 때때로 중종을 노골적으로 견제했고 그때마다 그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곤 했다. 그 후에도 중종은 점차 폭정의 정도가 심해지는 연산군을 보면서 그가 자신을 언제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군대만 보아도 기함을 할 지경이 되었다. 이는 반정이 있던 당일 중종의 태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정 당일 대신들은 중종을 우선적으로 호위하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던 사가에 군사를 보냈다. 자신의 집을 둘러싼 군사를 본 중종은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자결하려고 했다. 연산군이 마침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연산군에 대한 중종의 공포는 컸다. 이때 정신적 공황 상태의 중종을 진정시킨 이는 그의 아내 신씨였다. 사가를 둘러싼 병사들의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기에 그를 죽이러 온 이들은 아닐 것이라는 아내의 설명을 듣고서야 중종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고 한다. 잠시 후 반정이 성공하자 그때까지 자결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그는 자신을 데리러온 대신들과 함께 왕이 되기 위해 입궁하였다.
_총애를 담보로 정치를 펼친 군주, 중종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궁녀 출신 후궁 안씨의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조선의 제14대 임금이 되었다.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수많은 종친 중 한 명에 불과한 하성군이 조선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이는 하성군에게 엄청난 행운임과 동시에 크나큰 부담이었다. 모친상 중에 대신들을 맞은 열여섯의 하성군은 자신을 맞으러 온 대신들과 함께 울면서 입궁하였고 용상에 오르기를 머뭇거린 끝에 겨우겨우 즉위식을 올렸다.
(…중략…)
선조는 당시로서는 역대 조선 임금 중 최장 기간인 41년 동안 재위하였다. 선조의 치세는 재위 절반의 기간 동안은 평균 이상이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1년 이후 16년 동안은 충신을 미워하고, 재혼을 감행하며,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등 억지스러운 행동의 연속이었다. 훈구 세력이 완벽하게 사라진 조정을 이끌며 종계변무의 성공으로 개국 이후 조선에 최고의 영광을 가져온 선조의 리더십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으며 완전히 무너졌고 결국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선조가 노력하여 이룬 모든 영광은 임진왜란과 함께 덧없이 사라졌고,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한 임금은 조선 역사상 가장 무능한 군주로 기억되었다.
_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누린 임금, 선조

또한 광해군은 과감하게 일본과의 화해를 시도하여 일본과 조선의 국교를 회복시켰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이기에 조정의 반대는 거셌지만 광해군의 의지는 단호했다. 광해군은 국제 관계에서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명분이 아닌,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했다. 그는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고 이 흐름을 조선에 유리하게 바꾸고자 했던 단 한 명의 임금이었다.
하지만 무사 안녕과 미래의 번영을 위해 실리주의 외교를 선택한 광해군은 누르하치에게 국서를 보낸 지 1년 2개월 만에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된다. 신하들은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는 임금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중략…)
광해군은 외로운 군주였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전란(戰亂)이나 왜적이 아닌 혈육과 대북 세력이었다. 임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뛰어난 자질 덕분에 항상 시기와 질투를 받아야만 했다. 그는 배다른 동생들만을 총애하는 아버지 때문에 불행한 아들이었고, 진심으로 그를 싫어하는 친형 임해군 때문에 불행한 동생이었다. 자신보다 9살 어린 계모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툰 끝에 결국엔 왕위에 오르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임해군과 영창대군 모두를 죽여야 했다.
백성들은 세자 책봉 승인과 국왕 책봉 승인을 위해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올 때마다 열광적인 응대를 할 정도로 광해군을 사랑했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대금은 광해군에게 호의를 가졌지만 정작 그의 주변에는 진정으로 그를 위한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임금의 자리에 있었던 광해군이 폐위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현명하고 실리적인 외교정책과 민심보다 중요한 것은 명나라에 대한 충성과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대북과 손을 잡음으로써 현명한 신하들을 잃은 광해군은 결국 왕위도 잃고 아들과 아내도 먼저 떠나보낸 채 유배지에서 고독한 삶을 살다 죽음을 맞는다.
광해군이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던 두 번의 전쟁,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는 국호를 청(靑)으로 바꾼 대금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바닥에 찧는 대 굴욕 끝에 항복을 선언한다. 이후 조선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며 기나긴 퇴보의 시대를 겪게 된다.
_미완으로 사라진 성군의 영혼, 광해군

인조반정은 성공한 반정이었지만 인조는 성공한 군주가 되지 못했다. 인조는 반정의 명분으로 광해군이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일을 비난했다. 하지만 정작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있고, 며느리 민회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 두 손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한 인조는 광해군이 명나라에 배은망덕한 일을 비난하며 명나라를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두 번의 전쟁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후,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굴욕 끝에 항복하였고 북방 오랑캐의 나라에 세자와 아들들을 볼모로 뺏겼다. 인조는 재위 내내 광해군의 모든 치적을 부정하고 비난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광해군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군주가 되었다.
_단언컨대 가장 완벽한 최악의 군주, 인조

고귀한 백조로 태어난 연산군은 미운오리로 성장했다. 태어날 때에는 기쁨이 가득했으나 생모였던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난 후의 연산군은 가족과 신하들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가 미움을 산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그의 정통성 때문이었다. 왕위에 오르는 일이 당연했던, 아무와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던 연산군은 임금이 된 후 모든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했다. 임금의 권력이 굳이 강력할 필요가 없던 태평성세에 왕권을 강력하게 발휘한 일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손으로 기록되기에 연산군이 얼마나 ‘나쁜’ 군주였는지를 증명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의 악행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이들이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를 역으로 보여준다.
(…중략…)
정치란 적당히 밀고 당기면서 상생을 도모하는 것을 생명으로 한다. 만약 연산군과 사림이 각자의 자존심만을 내세우는 대신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을 했더라면 태평성세를 오래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연산군이 조금이라도 노련했었더라면 유생들의 집단 상소문, 사직서 등에 조회 거부, 와병, 단식투쟁 그리고 최후의 방법으로 형식적인 양위 발표로 대응했을 것이다. 성군의 대명사 세종대왕도 재위 말년 언론과의 대립에서 불리해지자 단식과 가출이라는 유치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연산군 또한 그랬었다면 사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훌륭한 성군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_예정된 비극이 만들어 낸 화려한 폐허, 연산군

숙종은 현종의 능 비문을 지을 것을 부탁하며 재차 송시열을 불렀다. 하지만 송시열은 죄인을 자청하며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며 노련하게 어린 국왕을 조련했다. 이제 막 즉위한 열다섯의 임금과 세 명의 임금을 모시는 동안 권력을 놓친 적이 없었던 예순여덟 신하 사이의 팽팽한 기 싸움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숙종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숙종은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려 온 인조와 효종 그리고 무기력했던 현종과는 전혀 다른,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남자였다. 송시열의 거절이 도를 넘자 숙종은 김만기를 호위대장으로 삼은 후 송시열의 벼슬을 강등하고 송시열의 편을 들었던 예조의 주요 관료들을 귀양보냈다. 또한 외삼촌 김석주에게 현종의 비문을 짓게 한 후 송시열의 제자 이단하에게 현종의 행장(行狀)을 짓게 했다.
이때 이단하가 예송부분에 있어 현종이 서인에게 죄를 물은 것을 모호하게 기록하자 숙종은 송시열이 잘못했다는 문구로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이단하가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그를 파직하며 말했다.
“그는 스승이 있는 것을 알 뿐 임금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_불온한 정체성이 만들어 낸 삼종혈맥의 완전체, 숙종

아버지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세손은 자신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찬 시선을 사방에서 느꼈다. 혜경궁 홍씨의 필사적인 보호가 있었음에도 정조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사도세자가 겪었던 고통을 알게 되면서 세손은 아버지가 느꼈던 울화증과 강박의 정체를 공감했다. 너무나 일찍 고통스럽게 철이 들었던 세손의 힘겨운 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자의 죽음을 방관하거나 주도했던 핵심 인물들(영조, 혜경궁 홍씨, 홍봉한)은 필사적으로 세손을 보호했다. 세자의 목숨을 앗아간 노론 세력들이 세손의 목숨까지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세 사람은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똘똘 뭉쳤다.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이들을 원망할 수도 없었고 감사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정조가 평생토록 짊어지게 될 비극이자 고통이었다.
(…중략…)
1776년,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장수하고 가장 오랜 기간 재위했던 영조가 여든두 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영조의 죽음으로 노론 벽파의 끊임없는 방해 속에서 위험천만한 인고의 시간을 보냈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 정조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기나 긴 가시밭길 끝에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후 모든 대신들 앞에서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시대를 시작한다.
_초인적인 노력으로 개혁을 주도한 천재 군주, 정조

조선시대 최연소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은 누구일까? 행운의 주인공은 귀성군 이준으로 세종대왕의 4남 임영대군의 아들이다. 본래 조선왕조는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하고 있었지만 왕실 세력을 키우는 의미에서는 종친의 과거 응시를 허용한 세조의 조치로 그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1468년,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을 세운 세조의 이종사촌인 종친 남이(태종의 셋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를 병조판서로, 귀성군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남이는 27살, 귀성군은 28살로 조선왕조 역사상 최연소 영의정 탄생이었다. 하지만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한명회와 신숙주를 비롯하여 종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훈구 공신 세력에 의해 역모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귀성군에 이어 두 번째로 젊은 나이에 영의정에 오른 인물은 홍국영이다. 정조의 최측근으로, 정조 즉위 초 세도정치를 휘둘렀던 홍국영은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며 서른세 살에 조선의 최고 벼슬인 영의정에 임명된다. 1772년(영조 48년) 25세 때 과거에 급제한 홍국영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승진을 거듭하는데 그가 거쳐 간 관아와 관직들은 조선 중후기를 대표하는 벼슬이라고 할 수 있다.
_토막 상식 : 홍국영의 출세로 알아보는 조선의 관직 및 벼슬

명나라의 멸망으로 청나라에서는 소현세자 부부를 더 이상 인질로 잡고 있을 명분이 없었다.
명나라를 완전히 정벌한 후 북경을 수도로 삼은 청나라는 봉림대군은 계속 인질로 남아있되, 소현세자 부부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나라 조정을 따라 북경에 가서 70여 일을 머무르게 되다. 이 기간 동안 세자는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을 만나 사상의 큰 변화를 겪는다. 새로운 문명의 실상을 접한 세자의 변화는 그의 죽음을 자초했다.
(…중략…)
인조반정은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명분에 집착한 조정에서는 두 번의 전쟁을 일으켰다. 인조 재위 기간 내내 백성들은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중립 외교를 펼친 광해군과, 전쟁을 막기 위해 몸소 인질이 된 소현세자에게 기대를 걸었다. 인조는 끝내 광해군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불안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결국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아직도 의혹에 쌓여 있고 그의 죽음에 결정적 용의자는 아직도 인조이다. 인조 덕분에 광해군과 소현세자는 역사 속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_인조반정의 인과응보, 소현세자

세자가 석고대죄를 하며 반성하는 동안 영빈 이씨(영조의 후궁, 사도세자의 생모)는 아들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며 결단을 독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영조의 입을 통해 기록되었으니 실제로 세자의 친어머니인 영빈 이씨가 과연 세자의 죽음을 종용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영조의 결단이란 종묘사직을 위해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영빈 이씨의 독려로 마음을 굳힌 영조는 윤5월 13일, 장장 20일 동안 대죄 중이던 사도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했다. 사도세자는 통곡하며 용서를 빌었으나 영조의 명령은 추상같았다. 신하들은 감히 임금의 명령을 말리지 못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도세자를 살려달라고 빈 사람은 영조가 재혼을 하던 해 세손으로 책봉된 손자(정조)뿐이었다.
영조는 세손을 내보낸 뒤 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가 들어가자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한 여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간 신음한 끝에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나이는 예순 아홉, 사도세자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던 날 홍봉한은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중략…)
영조는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조선 역대 임금 중 가장 치명적인 오점을 지닌 군주가 되었다. 남편 몫까지 아주 오래오래 살았던 혜경궁 홍씨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지만 동시에 친정이 몰락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존귀한 금지옥엽의 왕자로 태어나 부모에게 모두 버림받고 당쟁에 희생되어 엽기적인 방법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는 21세기가 되면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조선왕조 역사 상 가장 빨리 원자로 정해지고 세자로 책봉되어 성군의 꿈을 꾸었으나 정치권력의 살벌한 다툼 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도세자는 ‘정조’라는 찬란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_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콤플렉스, 사도세자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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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하다.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로 풀어나가는 왕의 이야기는 권력과 사람과 운명을 생각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 욕망의 실타래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책을 덮고 나면 행간에 숨어 있는 왕들의 마음이 여운으로 남는다.

김태균 (한국형 리더십 개발원 이사)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었던 왕들의 은밀하고도 매혹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왕으로 태어난 사람과 왕으로 만들어진 사람,
왕자로 태어났지만 왕이 되지 못한 사람…
그들의 불안하고도 우아한 공존을 통해 진짜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조선의 왕, 그들은 어떻게 왕의 자리에 오르고 지켜갈 수 있었나?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임금의 자리에 앉은 이들은 모두 26명이다. 이중 강제적인 절차를 포함한 양위가 5번, 공식적으로 성공한 반정이 2번 있었고, 왕과 왕비의 아들로 태어나 세자 시절을 거쳐 임금이 된 이들은 채 절반도 되지 않는다. 왕과 왕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정치적 계산에 의해 엉뚱한 인물이 왕위에 오르기도 했고, 세자가 되었다고 해서 모두 무사히 왕위에 오르는 것만도 아니었다. 왕과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나 선왕이 승하한 후 임금의 자리에 오른 조선의 임금은 26명 중 단 2명, 연산군과 숙종뿐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왕들은 어떠한 방법과 과정을 거쳐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또한 그 자리를 지키고 물려주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군분투했을까?
성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자신의 아버지 의경세자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예종이 일찍 승하하고 난 후 세조의 왕비 정희대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성종이 선택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노론과 가족들이 얽힌 정치적 이해관계에 희생되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치명적인 상처 속에서 성장하였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된 후에도 수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지만 초인적인 노력으로 왕위를 지켜냈다.
이처럼 출신을 초월하여 임금이 된 조선의 왕들은 시대의 요구와 정치적 암투를 견디고 이겨내야만 했다.

조선의 왕으로, 왕자로 살다 간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듣는다!
이 책에 나오는 왕들은 크게 넷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왕위 계승 후보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에 의해 왕으로 선택된 남자 세종, 성종, 중종.
* 외세의 공격과 내부의 분쟁을 다스리지 못해 최악의 혹은 미완의 군주로 남은 선조, 광해군, 인조.
* 왕으로,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남자 연산군, 숙종, 정조.
* 왕자의 신분으로 선왕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 효명세자.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왕의 아들, 동생, 손자, 방계종친 등 모두 26명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 책은 각자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왕위에 오른 이야기도 다르지만 조선의 왕으로, 왕자로 살았던 26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그들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과거의 잣대로 이야기하거나 벌하며 평가하지 않는다. 단지 수없이 실록을 읽어가며 그 행간 사이에서 느낀 조선 왕들의 인생 굴곡을 섬세하게 써 내려갔다. 그리고 행간에서 찾아낸 미세한 이야기를 통해 조선 임금들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당쟁에 희생된 것이 아닌, 끈질긴 생명력과 혜안으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었던 소현세자, 존명사대 시절의 변절자가 아닌 뛰어난 외교술과 현실적인 판단력으로 강대국에 끼인 조선의 부흥을 꿈꾸었던 광해군 등 조선 왕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동안 교과서, 야사, 드라마에서 들려주는 조선 왕들의 이야기에만 몰두해왔을 뿐 정작 그들이 치열하게 겪었던 진짜 이야기는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제는 머나먼 역사 속 완전무결하고 낯선 임금의 모습이 아닌, 생생하게 숨 쉬는 한 인간으로서의 임금을 알아야만 한다.
역사란 한 개인이 당시의 시대와 환경을 어떻게 인지하고 풀어나갔는지를 의미한다. 이 책은 조선의 왕들이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왜 임금이 되고자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왕위에 올랐는지, 어떤 고민을 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대면했는지를 생생하게 전한다. 그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조선의 역사는 물론 세상을 먼저 살다 간 그들에게서 인생이라는 거친 파도를 이겨낼 수 있는 혜안과 위안까지도 물려받을 수 있다. 단순히 머리로 배우는 역사가 아닌 한 시대를 살았던 왕들의 숨소리를 느끼고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을 살다 간 왕들의 역사는 곧 오늘을 살고 있는, 내일을 살아갈 우리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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